'바나나 맛'은 좋아!
지금의 여자 친구와 10년을 함께 했다. 스물에 만나서 이제 서른이니 서로의 이십 대를 통째로 맞교환한 셈이다. 때문에 사랑은 늘 어려워도 서로에 대해서만큼은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나의 편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런 여자 친구조차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내 편식 증세가 하나 있는데, 바로 ‘바나나는 못 먹으면서, 바나나 맛 제품은 즐기는 것’이다. 나는 바나나의 질감을 견딜 수가 없다. 과일이라기엔 이상하리만치 퍽퍽한 겉 부분도 별로지만, 심지의 미끈거리는 부분이 혀에 닿으면 목구멍이 콱, 하고 닫히는 기분마저 든다.
출처 : 빙그레 http://www.bing.co.kr/brand/milk/73
처음 내가 바나나를 먹지 못한다고 했을 때, 여자 친구는 잠시 의문스러워하긴 했지만 원래 그런 놈이려니, 하고 말았다. 그런데 곧이어 바나나 맛 과자라든가 바나나 맛 우유, 심지어는 바나나와 우유를 갈아 만든 바나나 셰이크까지 마시는 걸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고. 아니, 어쩌면 속은 기분이었으려나.
정작 당사자인 나는 아무런 이질감 없이 ‘바나나’와 ‘바나나 맛’을 구별, 아니 차별하며 살아왔는데, 여자 친구의 반응을 본 뒤로는 역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뭐야, 도대체 이거. 뭐 이 따위 편식이 다 있어?
그 이유는 예상치 못하게 드러났다. 몇 년 전부터 나의 엄마는 종종 부산으로 나들이를 나와(본가는 김해다.) 우리 커플과 식사를 하거나 커피를 마시곤 했다. 2년 전이었던가. 그날도 별다를 것 없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여자 친구가 엄마에게 일러바친답시고 “어머니, 경빈이 편식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 이상해요. 생 바나나는 입도 안 대면서 바나나 맛 나는 건 되게 잘 먹더라고요. 심지어 바나나 셰이크도 잘만 마시면서.” 그리고는 나를 향해 흘기는 눈빛. 늘 여자 친구와 호흡을 맞춰 나를 타박하던 엄마는 어쩐 일인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시더니 내 편식 역사의 한 단편을 알려주셨다.
“그게 사실은… 빈이가 막 분유 떼고 이유식 먹고 하는 아기였을 때, 뭐를 먹여야 하나 싶어가지고 고민이 많았거든. 엄마도 너무 어려가지고 뭘 잘 몰랐지. 지금처럼 인터넷이 잘 돼가지고 검색해볼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고… 하루는 바나나를 좀 으깨서 줬더만 너무 잘 먹는 거야. 다 먹고 또 달라고 보채기도 하고, 주면 주는 대로 다 받아먹고. 그래서 엄마는 신이 나서 바나나를 먹였지. 근데 한 날은… 먹은 바나나를 다 토해내더라고. 그 어린 아기가 얼굴이 시뻘게져가지고, 엄마도 억수로 놀랬지. 근데 그라고 나니까 빈이가 바나나를 아예 안 먹드라고. 아마 그거 때문이 아닌가 싶기는 한데…”
출처 : 코미디 tv
내 나이 스물여덟에 처음 듣는 이야기. 모든 결과엔 원인이 있는 법이라곤 하지만...
그걸 이제 알려주면 어떡해요, 엄마.
어느 부모가 대단하지 않겠냐마는, 적어도 내게 있어 나의 부모님은 정말 위대하다. 1989년, 무려 띠 동갑인 두 분이 결혼식을 올렸을 때 아버지는 서른둘, 엄마는 스물이었다. 나는 그해 10월의 마지막 날에 태어났다.
내겐 첫 우리 집이자 그들의 신혼집이 있던 곳은 김해 삼계동의 어느 산자락 아래. 지금은 도시 개발로 아파트 대단지며 번화가가 들어섰지만 그 시절만 해도 삼계동은 그야말로 산과 도로 뿐인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우리 집이 어느 정도로 제도권 밖의 구역에 있었는가 하면, 버스는 물론이고 쓰레기 수거차도 들르지 않았다. 해서 아버지의 오토바이가 아니면(내가 8살이 되던 해에 하얀색 티코를 타기 전까지, 우리 집엔 차가 없었다.) 엄마와 나는 버스 종점에 내려 히치하이킹으로 집에 돌아가곤 했다. 생활 쓰레기는 한데 모아 넓은 앞마당에서 캠프파이어 재료로 썼다. 화장실도 없어 신문지 위에다 볼일을 봤고 한참 후에 아버지가 직접 푸세식 화장실을 설치했을 때, 당시 6살이던 나는 손님들이 올 때마다 그 화장실을 자랑했다. 밤이면 산짐승들의 울음소리와 발소리가 문 앞을 서성였고, 거짓말처럼 하늘은 맑아 달빛보다 별빛이 더 환했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나의 부모는 나를 길러냈다. 특히 겨우 갓 스물이었던 엄마가, 나름 유복한 집안의 7남매 중 맏이였던 그녀가 나를 먹이고, 재우고, 달랬다. 그녀의 말처럼 누구 하나 가르쳐 준 사람 없고 지금처럼 인터넷 검색도 되지 않던 시절에 갓난아기였던 나를 먹이고, 재우고, 달랜 것이다. 내가 다 커서 대학을 가고, 이십 대를 다 지나고 보니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새삼 와 닿는다.
그랬던 시절에 바나나를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 내 모습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을까. 미음 한 그릇보다 값이 훨씬 더 나가는 바나나인들 어떠랴. 그러다 어느 날 내가 시뻘게진 얼굴로 바나나를 다 토해냈을 때, 그것이 그녀에게는 얼마나 큰 미안함이고 자책이었을까. 이제는 분명히 안다. 그녀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사실, 처음 연재 목록에 ‘바나나는 못 먹지만, ’바나나 맛‘은 좋아’라는 제목을 적을 때만 해도 그저 가벼운 썰을 풀어보자는 생각이었다. ‘내 얘기 좀 들어보세요. 참 괴짜죠? 저는 그런 편식왕이랍니다.’ 그러고 말 생각이었다. 그런데 글을 구성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바나나는 엄마가 나를 길러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일’ 중 아주 작은 하나의 증거였다. 그런데 내가 서른이 넘도록 바나나를 먹지 못하는 탓에, 더군다나 내게는 기억조차 없는 어릴 적의 일 때문에, 엄마에게 바나나는 ‘자식에게 미안한 일’ 중 하나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 겨우 바나나 따위로 엄마의 노력을 깎아내릴 순 없는 일이다.
매거진의 제목인 ‘편식왕’과 어울리지는 않지만,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바나나를 먹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그래서 이제 아무렇지 않다고, 오히려 엄마 덕분에 이제라도 바나나를 즐길 수 있는 거라고 말해야겠다. 편식왕이 할 수 있는 효도란 이렇게도 하찮고 사소하기 짝이 없다. 겨우 바나나 따위로, 겨우 바나나 따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