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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Oct 11. 2018

곤드레만드레? 억울한 곤드레 밥

맛을 이루는 기억

곤드레만드레? 억울한 곤드레 밥


한국 사람은 밥심


이제 겨우 서른인데도 문득 ‘내가 나이를 먹긴 먹었구나’ 싶은 순간들이 있다. 친구들과 불과 ‘얼마 전’의 추억을 얘기하다가 그것이 10년도 더 된 이야기라는 걸 깨달을 때. 무리한 운동 후에 근육통과 함께 관절통이 찾아올 때. 그리고 밥 없는 식사를 하면 어쩐지 속이 허하고, 한 끼 더 챙겨 먹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 보통 이십 대 중반을 기점으로 노화가 시작된다고 하니 이런 변화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여기면서도, 늘 생각하는 것과 실감하는 것의 무게감은 다르다.


나는 ‘한국 사람은 밥심’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 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말의 진의를 체감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밀가루 음식을 좋아했기 때문에 굳이 밥이 아니어도 충분했던 탓이다. 특히 면 성애자인 나는 각종 면류를 돌아가며 먹기만 해도 밥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서른이 되기 전까진, 그랬었다.

아, 뜨끈뜨끈한 쌀밥이여.

출처 : https://blog.naver.com/dnfldkswndls/220125202263


요즘은 새삼스럽게 밥맛에 눈을 뜬 기분이다. 똑같은 흰쌀밥이라도 온도나 밥이 된 정도에 따라 맛이 다른 게 느껴진다. 흑미밥은 까만 쌀밥, 잡곡밥은 모래가 섞인 쌀밥이라고만  여기던 과거의 내 혀는 미각의 일부만이 작동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요즘은 밥맛이 식사의 만족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밥에 뭔가 섞이는 게 싫었던 예전과 달리, 요즘은 흑미나 콩, 나물이 섞이기라도 하면 무슨 호사스러운 밥을 대접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편식왕이기 전에 나는 한국 사람이 분명하고, 한국 사람은 밥심으로 사는 것이, 또한 분명한가 보다.


곤드레 밥과의 첫 만남   


나물류와 함께 지은 밥 중에선 곤드레 밥을 가장 좋아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곤드레 밥을 처음 먹은 건 무려 스물여섯이 되어서였다. 학기 중이나 방학이나 할 것 없이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던 대학생 시절. 나는 이런저런 단기 아르바이트를 참 많이 했다. 신문배달, 공장 집진기 청소, 석산 발파 보조, 행사 매대 판대 등등. 그중 하나가 백화점 VIP 고객들의 나들이(?) 진행 보조였다. 나는 잘 몰랐지만, 백화점 차원에서 VIP 고객들을 대상으로 분기나 반기에 한 번씩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으로 나들이를 가곤 했었다. 고객들은 대부분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었는데, 나들이가 지루하지 않게끔 레크리에이션과 함께 행사를 진행하는 메인 MC가 있고 나는 그 옆에서 잡다한 보조 역할을 했다.


목적지는 경북 산골 어디쯤이었다. 텃밭 구경을 하면서 직접 수확도 해보고, 고즈넉한 산길을 걸었다. 그리고는 예약된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한 뒤에 유기농 제품들을 구입하기도 하고 절구에 떡을 치거나 빨래 방망이로 옛날식 빨래를 해보는 등 체험 활동도 이어졌다. 바로 그곳에서 나는 곤드레 밥을 처음 만났다.


곤드레는 향으로 먹는 나물


밥 위의 거뭇거뭇한 곤드레는 얼핏 젖은 김 조각 같기도 하고, 푹 익힌 시래기나 취나물  같기도 했다. 지금보다 편식이 심했던 당시의 나는 일단 그 비주얼이 그리 마음에 들진 않았다. 하지만 몇 시간 동안 나를 싹싹하게 챙겨주신 VIP 어르신들이 “총각, 여기 와서 먹고 일혀. 밥 먹을 땐 같이 먹어야제.” 하시는데, 내가 “저는 편식왕이라서 이런 거 안 먹어요.”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무튼 그것도 남의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면 일인 셈인데. 내가 또 그리 예의가 없는 청년은 아니었다.

결정체가 분명하다.

출처 : SBS 생방송 투데이


간장 양념장을 밥 위에 뿌려 슥슥 비볐다. 다소 부담스러운 줄기는 한쪽으로 제쳐두고 여린 잎들을 골라 밥과 함께 첫술을 떠먹었다. 쌀밥과 함께 고온고압에 푹 찐 곤드레 나물은 보기보다 훨씬 부드럽고 촉촉해서 식감에 거슬리는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 특유의 향이란. 짠 양념장 맛을 뚫고 코까지 올라와 은근하게 머무는 곤드레 향은 내가 스물여섯 해만에 처음 맡아보는 것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곤드레 밥 이전에 나는 곤드레라는 걸 먹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이어 줄기와 함께 먹으니 오히려 식감이 더 좋았다. 바로 옆에 앉은 할머니께서 “어이구, 총각 잘 묵네. 여 아지매요, 밥 한 그릇 더 주이소.” 해주신 덕에 곤드레 밥을 두 그릇이나 뚝딱 해치웠다.


비슷한 양념장으로 비벼 먹는 콩나물밥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다. 예를 들어 ‘기다림’은 서점의 책 냄새, ‘우정’은 함께 뛰어놀며 흘린 땀 냄새, ‘행복’은 갓 구운 빵 냄새, 하는 식으로 추상 명사에게 감각의 향을 입힌다면 곤드레 밥은 ‘건강’의 향이었다. 심지어 한상 가득 차려진 반찬들을 마다하고 김치와 곤드레 밥만 먹었는데도 전혀 아쉽지 않았다. 어쩌면 그날부터였을까. 내게 밥심이 중요해진 첫 순간이. 스물여섯이면, 그래 갓 신체 노화가 시작되고 있을 때이긴 했다.


곤드레 이름의 유래


다른 나물과 달리 곤드레 나물은 그 이름이 특이하다. 더 특이한 건, 인터넷 국어사전에 ‘곤드레’를 검색해보아도 곤드레 나물은 나오지 않고 ‘곤드레만드레’만 나온다는 점이다. 곤드레 나물의 정확한 학명이 ‘고려엉겅퀴’이고, 곤드레 나물은 일종의 별칭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고려엉겅퀴가 곤드레라고 불리게 된 걸까.


이런저런 이바구들을 찾아보면 ‘곤들레, 곤들레’ 하는 사투리에서 왔다는 설, 보릿고개 시절에 혈압을 낮추는 구황작물인 곤드레 나물을 과섭취한 사람들이 무기력해진 모습을 보고 이름을 지었다는 설 등등이 있었다. 확실한 정설은 없지만, 술에 취한 꼴인 곤드레만드레와의 관련성은 다분해 보였다. 안도현 시인도 한겨레에 연재했던 ‘안도현의 발견’이라는 칼럼에서 “곤드레만드레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은 속이 없다. 대궁이 비어 있는 곤드레가 바람에 그렇게 흔들리고 비틀거리는 것처럼.”이라며 빈 대궁 탓에 바람에 흔들리는 곤드레의 모습을 술 취한 이의 비틀거림에 빗대었다. 하지만 곤드레에 대한 가장 낭만적인 해석은 김남극 시인의 시 <첫사랑은 곤드레 같은 것이어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
한때 첫사랑은 곤드레 같은 것이어서
 햇살도 한 평 밖에 몸 닿지 못하는 참나무 숲
새끼손가락만 한 연초록 대궁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까실까실한
손은 비어 꺾으면 툭 하는 소리가
 허튼 약속처럼 들리는
 곤드레 같은 것인데
... (후략)’


아, 사람이 비틀거리는 이유는 비단 술에 취해서만은 아니다. 술 없이도 사람을 취하게 하는 사랑. 그 첫사랑의 약속은 속이 빈 곤드레 대궁이 꺾이는 것처럼 허무하고 허튼 것이기도 했으리라. 과연 시인은 시인인가 싶다. 곤드레 밥에 아련한 낭만의 맛까지 뒤섞이는 순간.


음식의 맛이란 어쩌면 감각과 더불어 기억, 지식, 낭만 그런 것들이 죄다 모여 이뤄내는 집합체인지도 모른다. 곤드레 특유의 향과 식감만으로도 곤드레 밥에 반해버렸던 스물여섯의 어느 날. 서른의 나는 이제 곤드레 이름에 관한 여러 이바구와 첫사랑에 대한 곤드레의 낭만까지 함께 버무려 곤드레 밥을 먹는다. 그러니 ‘곤드레만드레’의 오해에 억울할 필요도 없겠다. 그도 그 나름의 맛을 더해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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