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한다는 것
말해 뭐하겠냐마는, 우리 엄마는 요리를 잘 하신다. 독립해서 살다 보면 소위 말하는 ‘집밥’에 대한 향수가 엄마의 요리 솜씨를 추억 보정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엄마는 정말 요리를 잘 하신다. 손이 매우 크고, 간이 아주 잘 맞다. 약간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 등장하는 ‘엄마 이일화’ 스타일이랄까. 그 덕에 나도, 내 동생도 무럭무럭 살이 찌긴 했지만.
출처 : tvN
그런 엄마 덕분에 우리 가족은 밥상에서 “맛있다”는 말을 연호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아버지, 나, 동생. 남자 셋이 허겁지겁 식사를 하며 한 숟갈 먹을 때마다 “와, 진짜 맛있다.”, “크...”, “엄마. 이거 내일도 또 해줘.” 같은 말을 릴레이처럼 말하는 거다. 그러면 엄마는 “치, 맨날 먹는 건데, 뭐.” 라든가, “아, 참 이제 그만하고 조용히 밥 드세요.” 라든가 하는 퉁명스러운 말을 뱉었다. 아, 물론 얼굴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로. (어쩌면 나는 내 편식에 대한 자격지심과 방어기제로 더 과격하게 맛있다는 표현을 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집 남자 셋이 엄마 기분 좋으라고 미리 모의하고 맛있다는 말을 했던 건 절대 아니다. 단지 정말 맛있었고, 유전자의 힘으로 셋 다 맛있다는 표현을 멈추지 못하는 성격을 가졌을 뿐. 그땐 몰랐다. 누군갈 위해 만든 음식을 먹고, 그 누군가가 맛있다고 말하는 것의 의미를. 맛있다는 말의 힘을.
부산에 있는 대학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위치의 독립을 하게 됐다. 비록 정규직 회사원이나 공무원은 아니지만,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경제적 독립까지 한 뒤로 나름 ‘자취 짬밥’도 10년 차라 기본적인 요리는 할 줄 알게 됐다. 그리고 엄마의 요리 센스를 물려받은 건지, 내 착각인지 몰라도 나는 요리를 꽤 맛있게 하는 편이다.
하지만 내게도 어쩔 수 없이 집밥이 그리운 순간들이 있다. 정확하게는 집밥의 맛, 가족과 함께 있는 공간, 그 분위기 모두가 그리운 거겠지만 유난히 콕 집어 ‘어떤 요리’가 간절해지기도 한다. 바로 엄마의 두부조림이다. 심지어 외삼촌은 그 두부조림이 먹고 싶어서 전날 밤에 전화로 예약(?)을 하고 다음날 집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나도 그 두부조림만 있으면 밥을 세 공기나 비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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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두부조림은 국물이 작작하고 얼큰해서 조림과 찌개의 중간 즈음되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큼직하게 썬 대파와 양파가 부드러운 두부와 함께 식감을 더해준다. 벌겋게 달아오른 국물은 그것만으로도 별미라 밥에 슥슥, 비벼먹으면 한 공기 정도는 뚝딱, 해결된다. 납작하고 크게 담겨있는 두부는 겉은 살짝 구운 듯 질기지만 속은 부드럽다. 가끔 마늘이 많이 들어간 날엔 알싸한 마늘향이 코를 타고 올라오기도 하는데,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별미다. 주말에 김해 본가로 가서 외삼촌, 나, 동생이 둘러앉으면 전골용 뚝배기에 가득한 두부조림이 한 끼에 사라진다. 그러는 동안 셋이 합쳐 맛있다는 말을 족히 서른 번은 넘게 한다. 엄마는 입꼬리와 눈매는 웃으면서, 민망한 듯 눈썹만 찡그리고 “아따, 이제 그만 말하고 밥이나 드시지요?” 하신다. 그래, 사실 이런 장면까지가 죄다 그립다. 죄다 집밥의 추억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된장찌개, 김치찌개, 순두부찌개, 미역국, 각종 볶음 요리와 탕류 등등. 돈을 받고 팔 정도는 아니지만 만족스러운 한 끼를 책임질 정도로는 요리를 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도 점심은 상스치콤(상하이 스파이시 치킨 콤보다. 요즘 이렇게 줄여야 인싸라며?), 저녁은 돼지국밥이다. 집에선 불닭게티나 라면, 그것도 아니면 베이커리에서 사온 각종 빵들. 요리를 할 줄 알지만 ‘나를 위해’ 일일이 재료를 다듬고, 가스레인지 앞에서 요리를 하고, 그릇에 옮겨 담는 일련의 과정들이 귀찮다.
그래서 가끔 마음먹고 요리를 할 땐, 다른 사람을 위해서인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이라고는 했지만 쉽게 말해 애인을 위해서. 그러면 나라는 사람이 평소보다 더 깔끔해지고, 요리에도 더 정성을 들이게 된다. 혼자 해먹을 땐 고추나 대파, 양파 같은 것들도 대충 물에 적시기만 했는데 애인을 위해 요리를 할 땐 꼼꼼히 씻는다. 칼로 썰 때도 가지런하게 썬다. 볶음 요리를 할 때에도 원래는 재료들을 한꺼번에 들이붓고 대충 볶았는데, 재료마다 순서를 정해 식감이 살도록 신경을 쓴다. 설거지가 귀찮아 프라이팬 채로 먹던 버릇도 고쳐진다. 그릇에 조심히 옮겨 담고 주변에 튄 국물들을 닦아낸다. 그렇게 한 그릇을 내어놓고 나면, 말은 안 해도 내심 기대를 하는 것이다. “맛있겠지? 맛있다고 해주겠지? 맛있어야 될 텐데.”
다행히도 애인과 나는 좋아하는 음식의 간이나 입맛이 비슷해서 대부분 좋은 반응을 보인다. 그것도 그냥 말하는 게 아니라 한입 먹자마자 눈이 동그래져서는, 놀랍다는 듯이 숨을 들이쉬고, “진짜 맛있어!”라고 외친다. “가게에서 사 먹는 것보다 더 맛있어!”까지 나오면 내 광대는 승천하다 못해 거의 갈 곳을 잃어버린다. 아, 먹는 걸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는 게 이런 느낌인 걸까. 물론 느낌은 느낌이고, 나도 밥을 먹기는 하지만.
누군갈 위해 요리를 해보면, ‘이 맛에 요리한다.’는 말을 체감할 수 있다. 그러면서, 문득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도 혼자 드실 땐, 대충 있는 밑반찬으로 편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으실 텐데 가족들 먹이려고 그 고생을 하셨던 거겠지. 일일이 장을 보고, 재료를 다듬고, 몇 번이고 간을 보면서. 이미 다 된 것 같은데도 몇 분 더 끓여야 된다며 뜸을 들이고, 예쁜 그릇을 고르고 골라 옮겨 담고, 밥상 앞에 앉은 가족들의 상기된 표정을 보면서. 그런 후에 듣는 “맛있다!”는 말들이 엄마에겐 어떤 의미였을지. 위로이거나, 보람이거나, 어떤 응원이기도 했을지.
글을 쓰면서 점점, 점점 더 엄마의 두부조림이 간절해졌다. 이번 주말에 간다고 전화를 해야겠다. 두부조림이 너무 먹고 싶다고. 가서, 두 공기 정도는 싹싹 비워야지. 엄마가 좋아하는 카스텔라를 사 가야겠다. 저녁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돼지갈비를 먹자. 아니, 일단은 두부조림이다. 철딱서니 없지만 두부조림부터 먹어야겠다. 아, 진심을 가득 담은 “맛있다!”는 말도 잊지 않고 챙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