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패 삼겹 숙주 볶음
자취를 막 시작한 대학 신입생 시절, 대부분의 끼니는 편의점이나 학식에서 해결했다. 값이 싸고, 친구들과 함께 먹을 수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할 줄 아는 요리가 없었다. 그나마 후하게 쳐도 겨우 라면 정도.
그렇게 지내면서도 딱히 불편함은 없었는데, 얼마 가지 않아 ‘그래도 자취생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요리 실력 아니겠어?’하는 이상한 허세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엔 TV에서 젊은 남자 연예인이 찌개라도 하나 끓이면 “어쩜 이렇게 요리를 잘하세요!?”라는 패널들의 호들갑과, 바로 이어지는 “아, 제가 예전에 자취를 했었거든요…”하는 겸손한 대답이 하나의 레퍼토리였으니까. 그 시절의 나도 그런 걸 기대했었던 거다. 언젠가 누군가 나에게 "어쩜 이런 요리도 할 줄 아시네요!?"라고 물으면 "저 이십 대에 자취했었거든요."라고 대답하는, 그런 장면을.
출처 : 스포츠동아 http://sports.donga.com/3/all/20140827/66033869/2
그런데 막상 고시원 공용 주방의 가스레인지 앞에 서있어도, 떠오르는 레시피는 없었다. 할 줄 아는 게 없었으니까. 당시만 해도 찌개류는 뭔가 굉장히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졌고, 갖가지 밑반찬들은 도무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 결국 처음 시도했던 것이 바로 볶음밥이었다. 딱히 요리랄 것도 없었던 것이, 그냥 밥과 재료를 한꺼번에 프라이팬에 털어 넣고 무조건 강불에 볶기만 했다. 그래도 그 시절엔 밥이 타서 눌어붙은 볶음밥을 해낸 스스로가 대견했다.
볶음 요리의 차원에서(?) 내 이십 대의 역사를 설명한다면, ‘볶는 법을 익히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냅다 들이부어 마구잡이로 볶는 모양새가 마치 앞뒤 가리지 않고 무모하게 뛰어들던 이십 대 초반을 닮았다면, 이제 재료마다 순서를 지키고 불의 세기를 조절하는 건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차근차근 생활을 꾸리는 지금의 삼십 대와 닮았다. 이러나저러나 완성된 것이 ‘볶음 요리’인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 맛과 식감은 천지차이다. 이러나저러나 살아지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 삶의 질이나 만족감이 다르듯이.
특히 내가 볶음 요리의 섬세함을 깨달았던 건 바로 대패 삼겹 숙주볶음을 하면서였다. 처음엔 늘 그래 왔듯, 레시피에 있는 재료들을 한꺼번에 넣고 볶았다. 냉동 대패 삼겹, 숙주, 양파, 팽이버섯, 굴 소스 등등. 결과는 엉망진창이었다. 대패 삼겹이 익을 때까지 볶고, 볶고, 또 볶다 보니 양파는 익다 못해 타버렸고 숙주는 숨이 다 죽어 흐물흐물해졌다. 맛술도, 다진 마늘도 없이 냅다 볶은 대패 삼겹에선 고기 누린내가 났고, 굴 소스의 풍미까지 덮어버렸다. 그때 깨달았다. ‘아, 이렇게 볶으면 안 되는 거구나.’
그랬던 내가 지금은 대패 삼겹 숙주볶음을 나의 시그니처 요리로 자부하기에 이르렀다. 레시피는 검색만 하면 금방 확인할 수 있지만, 정말 맛있게 완성되는지 여부는 직접 해봐야만 알 수 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이제는 매번 균일하게 좋은 맛의 대패 삼겹 숙주볶음을 해낸다. 나의 레시피는 이렇다.
프라이팬에 참기름을 조금 붓고 팬을 기울인다. 다진 마늘과 채 썬 파를 참기름에 튀기듯 약불로 잠시 볶으면 고소하면서도 깊은 맛이 더해진다. 그런 후에 대패 삼겹을 양껏 올려 중불에 익혀준다. 약 80% 정도 익었다 싶으면 맛술을 더해준다. 누린내도 잡고, 고기의 식감도 더 좋아질 수 있도록. 이어서 굴 소스와 진간장, 올리고당과 후추를 넣어 볶는다. 알싸한 맛이 필요하면 채 썬 청양고추를 듬뿍 넣는다. 이제 그 자체만으로 요리가 완성되었다 싶을 때, 씻은 숙주와 팽이버섯, 양파를 넣고 원하는 식감이 될 때까지 빠르게 볶아준다. 글을 적고 있는데, 침이 고인다.
출처 : http://egloos.zum.com/gorsia/v/2393279
이렇게 완성한 대패 삼겹 숙주 볶음은 흡사 인도네시아 식 볶음 국수인 미고랭을 연상케 한다. 숙주와 팽이버섯, 양파가 일종의 면 역할을 하는 것이다. 거기에 얇고 기다란 대패 삼겹까지 한 젓가락에 집어 입안에 넣으면… 간 조절만 잘 한다면 밥이 필요 없는 한 끼의 메뉴가 된다. 요즘도 입맛이 없을 때면 바리바리 장을 봐서 대패 삼겹 숙주 볶음을 해 먹는다. 만족스럽게 요리를 완성한 뒤 한입 집어먹으면서, ‘그래 이제 예전의 내가 아니야. 나 서른이라고. 볶을 줄 아는 나이, 서른,’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물론 지금은 자취 생활 10년의 짬밥(!?)으로 대패 삼겹 숙주 볶음 말고도 꽤 많은 요리를 직접 해낸다. 흔한 찌개류와 국 종류는 물론이고, 파스타와 별미 야식까지. 하지만 만약 누군가 내게 “맛있는 것 좀 해줘.”라고 말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대패 삼겹 숙주볶음을 할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필살기 같은 거라고 할까나. 요리에서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 필살기 하나쯤 갖는 건 꽤나 유용하고 멋진 일이다. 그래 봐야 셰프 분들의 요리에 비할 바는 전혀 못 되지만, 기대 이상의 맛 정도는 전해줄 수 있으니까.
출처 : http://33jaeseok.tistory.com/234
아, 물론 필살기라고 해서 굳이 하나만 갖고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다다익선, 좋은 건 많을수록 좋으니까. 하지만 언젠가 내 필살기가 열 개, 스무 개를 넘긴다 해도 제일 첫자리엔 대패 삼겹 숙주 볶음이 있을 것 같다. 혹시 내가 한 요리를 처음 맛본 누군가가 “와, 진짜 맛있네요!”라고 칭찬을 하면, “제가 예전에 자취를 했었거든요.” 겸손한 척하는 한 마디를 마지막 조미료로 더한 대패 삼겹 숙주 볶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