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체험하기 전에, 글로 먼저 접하게 되면 '삶의 정답'을 쉽게 말하게 된다. 인문교양서나 철학서, 자기 계발서 등을 많이 읽은 사람일수록 그렇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책들을 많이 읽기'만' 하고 실천은 하지 않은 사람들.
10대, 20대 시절의 나도 그랬다. 독서량이 아주 많은 편이 아니었는데도 책에서 말하는 진리, 정답 따위에 쉽게 마음이 동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론적으로 옳은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이다. 성실해야 한다, 돈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어야 한다, 기로에 섰을 땐 자신의 열정과 신념을 따라야 한다 등등. 그러나 살아보면 알게 된다. 성실함도 때때로 나를 배반하고, 돈이 목적이 아니라면 직업을 이어갈 원동력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의 열정과 신념을 따르는 것이 주변인들에게는 이기적인 행태로 보여지기도 한다는 것을.
정답이라 믿었던 것들이 실제의 삶에 통용되지 않을 때, 혼란은 시작된다. 학교에서 배운 도덕률들이, 청춘의 패기로 밀어붙였던 행동양식들이 무용해지는 순간을 마주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사회의 본모습'이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융통성'이라는 편리한 말로 상황을 뭉뚱그리기도 한다. 순응하지 않으면 말 그대로 '융통성 없는 사회부적응자'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도 엄습한다.
무엇보다 두려운 점은, 그런 순간을 마주했을 때 이미 제도적으로는 '배울 만큼 배운 성인'이 되고 난 후라는 점이다. 나를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자리에 앉혀놓고 가르쳐 줄 스승도 없고, 마땅히 무어라 검색해야 지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막막하다.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 서른도 중반을 넘기고 나면, 누구에게든 "잘 모르겠어요."라는 말을 하기에도 민망하다. 웬만큼 자기 분야의 전문성도 자리 잡고, 처세술에도 능하고, 경제적으로도 계획이 있어야 할 나이인 것 같은데 이제와 "잘 모르겠어요."라니. 이론은 빠삭한데 실천에는 서툴고, 용기는 부족하면서 후회는 넘치는 상태. 삶에 정답이 있다면 좋겠고, 누구든 그 정답을 알려주었으면 하는 상태.
어쩌면 삶의 '정답'이라는 건 없다는 관점이 오히려 필요한 때인지도 모른다. 정답이란 문자 그대로 '옳은 답'이라는 뜻도 있지만, '1+1=2'처럼 '보편타당하게 통용되는 답'이라는 뜻도 있다. 그러고 보면 제각각, 저마다의 삶에 '정답'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부터가 얼마나 무모했던가. 나의 최선이 너의 최악일 수도 있고, 나의 행복이 너의 불행일 수도 있는데. 똑같은 문제를 맞닥뜨려도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헤쳐나가는 건데. 스물여덟에 사회에 나서서 처음 라디오 작가의 길을 이끌어 준 선배이자, 멘토인 유정임 작가님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다가, 이런 내 마음을 대변하는문장을 발견했다.
"정답이 어디 있는가. 상황에 맞는 해답을 찾자."
그렇다. 삶은 매 순간 문제의 연속이기도 하지만, 선형적으로 보면 결국 풀이의 연속이다. 시험 문제의 정답을 찾으면 시험이 끝나는 것과 달리 삶의 문제는 답을 찾았다고 해서 삶이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무수한 문제들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정답' 아니라, 각각의 문제들을 풀어나갈 그때그때의 '해답'이 필요하다. 그 해답들은 언제나 진행형의 동사로 주어지므로, 삶은 계속된다.
정답이 간절해지는 어느 밤은 또 올 것이다. 그럴 때마다 찬찬히 해답을 찾으려 마음먹는다. 나는 정답을 찾아 삶이라는 책을 덮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해답을 실천하며 삶의 다음 페이지를 펼치고 싶은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