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도 여름 방학이 필요해
회사를 관뒀다. 오래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이직이 예정되어 있거나, 먹고사니즘을 해결할 다른 방법을 모색한 건 아니었다. 쉬고 싶어서 그만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지금의 회사를 그만 다니고 싶었다.
퇴사하는 김에, 원하는 곳으로 떠나기 지금처럼 적기도 없을 것 같아 유럽 여행을 갔다. 마드리드에서 프라도 미술관을 구경하고 저녁을 먹기 위해 오징어튀김 샌드위치 맛집을 찾아갔는데 하필 휴무였다. 아쉬운 마음에 '화요일 휴무인가? 내일 오면 열려 있으려나?' 생각하며 운영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가게 앞을 자세히 훑어봤다. 한 달간 휴가라고 써놓은 글이 보였다. '와, 휴가를 한 달씩이나? 부럽다. 이 집 오징어튀김 샌드위치 먹긴 글렀네'라고 생각하며 돌아섰다.
스페인을 떠나 이탈리아로 왔을 때였다. 초콜릿과 젤라또를 사 먹기 위해 피렌체의 한 초콜릿 가게로 향했다. 그런데 그 가게도 한 달 휴무라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제서야 '유럽 사람들은 여름휴가를 다 한 달씩 가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서 유튜브로 유럽 관련 콘텐츠들을 이것저것 보고 있는데, 알고리즘이 [여름 휴가만 5주? 파비앙이 말하는 프랑스 바캉스 문화]라는 제목의 영상을 추천해 줬다. 유러피언들은 여름휴가를 한 달씩 가는 게 맞구나 하며 영상을 클릭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최소 5주 이상의 여름휴가를 보낸다고 한다. 7월부터 바캉스를 떠나기 시작해 8월이면 파리지앵들은 모두 파리가 아닌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7~8월에는 로컬 맛집인 유명 레스토랑, 카페, 빵집들이 영업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관공서도 쉰다고 한다. 파리를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이 시즌을 피하는 것이 좋겠지만 한국인의 여름휴가 시즌도 보통 8월인걸. 나도 7~8월에 유럽에 있었지만, 다행히 내가 방문한 도시들은 그리 비어있지 않았었다.
그래서 프랑스인들은 이 긴 바캉스를 어떻게 보내는고 하니, 대체로 프랑스 내 조그만 시골 동네의 별장에서 5주 내내 생활하며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관광과 경험보다는 휴식에 중점을 둔 것이다. 마치 삼시세끼 실사판처럼 매일 밥 하고 장 보면서 마음을 비우는 시간을 가진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조승연 작가님은 한국 사람들이 볼 때는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나도 공감했다. 한국인에게 이런 휴가 스타일이 사치처럼 보이는 이유는 5주 휴가가 한국 사회에서는 가능하지도 않고, 휴가를 길게 내는 것도 눈치 보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혼여행이 아닌 이상 보통 3박 4일 정도가 최선이려나. 그러니 이토록 긴 휴가가 주어지면 다신 없을 기회일지도 모르니 최대한 활용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3년 근속 시 2주 리프레쉬 휴가, 5년 근속 시 한 달 리프레쉬 휴가를 주는 제도가 있었다. 리프레쉬 휴가를 앞둔 사람들은 모두 휴가 동안 무엇을 할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프랑스인처럼 휴가를 보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매년 5주의 휴가가 주어진다면 나도 가끔은 프랑스 st의 바캉스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퇴근하면 그 이후엔 업무 관련 전화도 안 받고 이메일도 안 보고 문자 답장도 안 하고 주말에도 완벽하게 휴식이 보장된다고 했다. 워라밸을 찾아 프랑스 노동자로 사는 삶 꽤 괜찮을지도...?
최근 읽은 책 <궁금한 건 당신>에는 베를린에 사는 한국인 노동자의 일에 대한 인터뷰가 나왔다. 인상 깊었던 내용 중 하나는 베를린에서 11년 동안 식당을 운영할 수 있는 비결로 '쉼'을 꼽은 것이다.
"독일에 처음 왔을 때 놀랐던 게, TV를 보는데 영세민이라 해야 하나? 나라에서 금전적으로 지원해 주는 사람들이랑 장관이 토론하는데, 그 사람들이 흥분하면서 우리는 여행 갈 돈도 없다, 이러는 거예요. 귀를 의심했어요. 아니, 국가에서 주는 돈으로 살면서 무슨 여행? 근데 장관이 진땀을 흘리며 대답하더라고요. 노력하겠다고. 여기 시스템을 모르니 충격이었죠."
나도 쉬니까 너도 쉬어야지. 이 나라는 쉼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처음 가게를 열 때 사람들은 조언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열어야 한다고. 장사란 그런 거라고. 하지만 이젠 그 말을 듣지 않는다. 여름엔 3주 휴가도 떠난다.
"자주 오는 손님이 그러더라고요. 아쉽지만, 네가 힘들어서 그만두는 것보단 낫다. 그건 우리 손해니까. 단골손님이 어디 가겠니? 쉬고 와."
일을 잘하는 것만큼이나 잘 쉬는 것 또한 어렵다. 특히나 회사를 그만둔 상황에서는 쉬는 것에도 부채감을 느끼기 쉽다. 나 역시 노는 건 유럽 여행으로 충분했다는 생각에 자꾸 생산적인 일을 찾는다. 정말 온전히 놀고 쉬면서 스스로를 한심하고 쓸모없는 사람으로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