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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emin Park Oct 18. 2021

NFT 아트를 통한 예술계의 탈중앙화 (1)

현대 예술 정의론에서 예술계의 의의

NFT 아트가 양적으로 급팽창하면서 관련 논란도 커지고 있다. 논란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NFT 아트를 예술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둘째, NFT 아트가 고가로 낙찰될 만큼 훌륭한 예술인가 하는 점이다. 전자는 NFT 아트를 분류적 측면에서, 후자는 비평적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현대 예술 정의론을 통해 NFT 아트의 분류적 측면을 살펴본다. 현대 예술 정의론은 예술계의 역할을 강조한다. NFT 아트가 예술이라면, NFT 아트를 예술로 정의하는 예술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NFT는 퍼블릭 블록체인의 탈중앙화된 성격을 최소한 규범적으로는 계승한다. 이는 NFT 아트를 규정하는 예술계 자체가 탈중앙화되어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탈중앙화된 예술계는 전통적인 디지털 아트 밖으로 그 외연을 확장하고 있는 NFT 전체를 NFT 아트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일상 속 다양한 심미적 경험을 누구나 디지털 아트로 담을 수 있는 NFT 아트는 다원주의 미학이나 듀이의 경험으로서 예술(art as experience) 개념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현대 예술 정의론에서 예술계의 의의


과거 예술은 대상을 모방하거나, 예술가의 심적 상태를 표현하거나, 고유한 형식을 작품에 내재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각각 모방론, 표현론, 형식론으로 정리된다. 이러한 예술 정의는 사진, 추상미술,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레디메이드(ready-made) 등 현대 예술을 설명하는데 실패하면서 힘을 잃게 된다.


레디메이드나 앤디 워홀(Andy Warhol)의 브릴로 상자(Brillo Box) 등 예술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작품이 등장함에 따라, 현대 예술은 더 이상 모방, 표현, 형식이 아니라 예술의 존재 그 자체를 고민하게 됐다. 이를 두고 단토는 예술의 종언을 선언한다. 예술의 종언은 예술이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대에는 오히려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예술이 장려된다.


예술 철학자들은 이러한 다양한 예술을 포괄하는 예술의 정의를 고민해왔다. 우선 듀이는 예술과 일상 경험의 분리를 비판한다.순수예술이라는 환상 속에서 예술이 일상의 심미적 경험과 괴리된 것으로 오인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예술의 경험은 완결성을 가진 ‘하나의 경험’, 특히 그러한 경험 중 특히 심미적 질성(quality)에 초점이 맞춰진 의미 있는 심미적 경험이다. 예술의 경험은 예컨대 “파리에서 맛있는 식사를 했던 경험”과 같이 일상 속 심미적 경험과 궁극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다만 예술적 경험은 개인 경험을 넘어서 특정 매체를 통해 다른 사람들도 체험할 수 있는 형태로, 즉 공동체에서 소통 가능한 형태로 표현된다.


듀이는 예술의 핵심을 심미적 경험으로 제시하고 이 심미적 경험을 본질주의적인 접근이 아닌 일상의 경험 안에서 설명했다. 이러한 프래그머티즘적 접근은 현대의 대중예술 및 일상 속 공공 미술의 가치를 설명하는데 유용하다(김진엽, 2018; Shusterman, 2000/2020).


그러나 듀이의 예술론은 예컨대 레디메이드 작품과 공산품을 사실상 구분하지 않는다. 요컨대 심미적 경험은 일상 속에서나 예술 속에서나 모두 발견될 수 있는 유개념에 가까우며 예술과 비예술을 구분하는 종차로 보기는 어렵다.


현대 예술 철학에서는 이러한 종차를 다각도로 탐색해왔다. 예술 정의 불가론에서는 이러한 종차를 완벽하게 발견할 수 없다고 본다. 웨이츠는 예술 간에는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만 존재하며 예술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공통된 특징은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공성조차도 예술을 정의하는 조건이 아니며, 어떤 조건도 예술을 닫힌 개념으로 만드는 것으로 창조성을 침해하게 되는 모순을 초래할 것으로 보았다.

Weitz, M. (1956). The role of theory in aesthetics. The journal of aesthetics and art criticism, 15(1), 27-35.


예술 정의 불가론은 가족유사성을 발견하는 것 외의 예술 정의를 포기함으로써 다양한 객체를 예술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분명 어떤 것은 예술로, 다른 것은 비예술로 분류된다. 예를 들어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기성품과 완전히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기성품은 예술이 아니고 워홀의 작품은 예술로 인정받는다.


예술 제도론에서는 예술계가 분류적 측면에서 예술의 종차를 역사적으로 구성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딕키는 예술을 1) 어떤 사회 제도, 즉 예술계(art world) 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감상을 위한 후보의 자격을 부여한 2) 인공품으로 정의한다.


예술계는 어떤 기관이 아닌 일련의 실천(practice)을 통해 정의된다. 예술로서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결혼처럼 일종의 수행문적인(performative) 성격을 띤다. 이러한 수행을 하는 이들로는 예술가, 예술계의 대중으로서 관람객, 예술사가나 예술철학자 및 비평가와 같은 이론가들, 기자, 박물관장 등이다. 예술계는 예술가가 예술계의 대중에게 예술 작품을 전시하기 위한 체계의 총체이다.


예술 제도론은 예술 정의 불가론을 지양하면서도 예술 정의 불가론에 준하는 개방성을 갖춘 것처럼 보인다. 우선 예술 제도론의 예술 정의는 분류적 정의이지 평가적 정의가 아니다. 즉 어떤 작품이 수준이 떨어지기 때문에 예술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것은 배제한다. 또한 어떤 것을 예술로 자격 부여할 수 있는 권한은 예술계에서 모종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다. 어떤 인공품이 예술 작품으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예술계의 모든 사람이 동의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원주의 미학에서는 예술 제도론이 사실상 예술 정의를 예술사에 맡기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는 예술 제도론이 반동적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예컨대 예술 제도는 고급 예술이나 서구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다원주의자들은 제도를 혁파하는 아방가르드나 힙합 등 대중예술에 주목했다. 그러나 아방가르드 역시 제도 내로 수용됐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직업적인 대중예술 생태계 역시 그 나름의 제도화가 이루어졌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상의 현대 예술 정의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술은 일상적 경험과 동떨어진 순수예술이 아니다. 현대 예술에서 예술적 경험은 근본적으로 일상 속 의미 있는 심미적 경험과 같다. 다만 어떤 심미적 경험이 공동체의 경험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경험이 글이나 그림, 음악 등 매체를 통해 표현되면서, 그 표현물을 예술로 체험하는 공동체가 존재한다.

둘째, 예술 제도론은 이러한 공동체를 명시적으로 예술계로 명명한다. 어떤 작품은 예술계의 자격 부여라는 수행적 절차를 통해 비로소 예술 작품이 된다. NFT 아트도 이러한 공동체의 수행 속에서 태어난다.

셋째, 다원주의 미학은 예술계와 그 제도가 스스로를 혁파할 정도로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아방가르드나 대중문화 역시 완전히 개방적이지는 않다. 이제 주어진 과제는 예술 작품으로서 자격을 부여하는 공동체가 존재하면서도, 제도를 스스로 혁파하는 개방성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이다.  NFT아트는 그 가능성을 열어준다.



출처:

박대민(2021). NFT 아트 : 예술계의 탈중앙화와 흔적의 아우라. <한국언론정보학회>. 109호. 127-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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