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FT 아트가 만드는 크리에이터 경제
논란에도 불구하고 비플의 작품 ‘‘매일: 첫 5000일’은 예술품으로 분류하는 데에는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우선 비플 작품의 예술성 자체를 평가하면서 이 작품을 예술로 간주하려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크리스티의 작품 설명처럼 이 작품은 장장 5000일 간의 연속된 시간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시간성에는 내용적으로 5000일간 일어난 일상적, 시사적 사건 외에도, 형식적으로 디지털 아트의 매체로서 그 제작 도구와 NFT 기술을 포함한 디지털 인프라의 발전, 비플이 다양한 실험을 통해 도구의 가능성을 끌어내는 과정, 비플 자신의 예술적 숙련도의 발전 등이 융합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을 예술품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평가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현대 예술 정의론의 관점에서 이 작품은 이 작품을 예술로 분류하는 예술계 때문에 예술이 된다. 그러한 예술계의 구성원은 다양하다. 우선 크리스티는 이 작품을 예술품으로 간주하고 경매를 부쳤다. 낙찰자를 포함한 입찰자들도 이 작품을 예술품으로 간주하고 경매에 참여했다. 비플 작품을 오랫동안 예술로 감상해온 이들도 존재한다. 예술 작품을 논하는 팟캐스트나 미술계 잡지 또는 신문의 예술면에서도 비플 작품을 다뤄왔으며, 평가적 측면에서도 예술품으로서 다른 예술품과 비교됐다. 일부는 비플 작품을 평가 절하할 수도 있지만, 예술계 안팎에서 비플 작품에 예술 지위를 부여하는 이들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비플의 작품을 예술로 분류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NFT 아트까지 예술로 볼 수 있을까? 우선 디센트럴랜드의 가상 전시장에 전시된 디지털 아티스트의 NFT 아트는 최소한 분류적 의미에서는 예술로 간주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첫 트윗과 같은 디지털 수집품, 게임 아이템, 유명 운동선수의 트레이딩 카드 등에 NFT를 결합했을 때 이를 모두 NFT 아트로 분류할 수 있을까? 우선 이러한 NFT 연계 디지털 콘텐츠에 예술의 지위를 부여하는 전통적 예술계가 있다면, 이들을 NFT 아트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좁은 의미의 예술제도론을 적용하는 것이다.
경험으로서 예술에 대한 논의는 NFT 아트가 예술계로부터 예술의 지위를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심미적 경험을 제공하는 예술로서 작동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수많은 일상들이 디지털 콘텐츠로 표현된다. 그 중에 몇몇 디지털 콘텐츠들이 NFT 아트로 만들어진다. 대다수는 공동체의 의미 있는 경험으로 공유되지 못하고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일부는 특정 공동체에서는 심미적 가치를 인정받는다.
물론 NFT 아트 이전에도 사용자들은 읽고, ‘좋아요’ 등 감정을 표현하고, 댓글을 달고, 공유를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디지털 콘텐츠에 의미를 부여하고 공동체를 만들어왔다. 그러나 NFT의 대체 불가능성이라는 속성을 통해 사용자들은 일상을 기록한 디지털 콘텐츠에 고유한 디지털 인증서를 부여함으로써 좀 더 공식적인 자격을 부여할 수 있게 됐다. 그러한 사용자들의 공동체는 전통적인 예술계와 그 제도 밖에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경험으로서 예술의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즉 NFT 아트는 예술계를 탈중앙화하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가 예술의 자격을 부여한 NFT 아트는 특정 공동체의 일상 속 심미적 경험과 더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이렇게 보면 NFT 아트는 어떤 인공물을 예술 작품으로서 자격 부여하는 공동체가 존재하면서도, 그 공동체가 스스로 제도화되는 것을 혁파하는 개방성을 찾아야 하는 현대 예술 철학의 딜레마를 기술적으로 풀어간 사례로 볼 수 있다. 그 해법은 예술계의 탈중앙화이다. NFT 아트의 심미적 가치를 인정하는 공동체는 개인일 수도 있고 가족이나 친구들일 수도 있고 바둑계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추천 알고리즘을 통해 관심사(interest)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프로필(profile) 주체로서 느슨한 취향 공동체일 수도 있다(박대민, 2020). 이 때 NFT 아트의 가격은 공동체의 규모나 의미 부여 수준 등에 따라 결정된다.
NFT 아트에 투기성도 엿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소수 팬덤 공동체에 의존해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고자 하는 창작자들이 노동의 대가를 얻을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측면도 크다.
예를 들어 1클릭당 1원을 주는 광고 플랫폼에서는 월 100만원의 수입을 거두려면 한 달에 10번씩 광고를 클릭하는 사용자 10만명을 모아야 한다. 창작자들은 그만큼 일반화된 취향에 맞춘 콘텐츠를 생산해야 한다. 반면 월 1만원의 구독료를 내는 경우라면 구독자 100명만 모아도 된다.
더 나아가 NFT 아트로 한 작품을 100만원에 팔 수 있다면, 애호가 1명에게만 소구해도 된다. 그런데 이 애호가는 공동체의 대표 구매자일 뿐이다. 공동체 내 다른 애호가들도 소유 여부와 무관하게 NFT 인증서만 빼고 디지털로 완전히 동일하게 복제될 수 있는 작품을 언제 어디서든 향유할 수 있다.
미디어 블록체인으로서 NFT는 예술 제도의 인정이나 상업화에 휘둘리지 않은 수많은 소규모 취향 공동체가 자신들만의 심미성으로 NFT 아트를 생산하고 공유할 기회를 제공한다. 창작자들은 무료로 제공되는 지상파 방송국과 유튜브에서 월 구독료를 내는 넷플릭스로, 별풍선을 주는 아프리카TV로, 그리고 NFT 아트 작품 하나를 파는 오픈씨로 이주해간다.
이는 NFT 아트가 반드시 컬트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듀이 식으로 말하자면, NFT 아트는 정성 들여 만든 공예품과 예술품이 구분되지 않았던 시대처럼 일상의 심미적 경험을 담은 작품이 의미 공동체 내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가능성을 현대에 다시 제공한다. NFT 아트는 더 이상 예술계가 수여하는 수행을 통해 예술로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 공동체가 인정하는 경험으로서 예술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어떤 탈중앙화된 의미 공동체가 해당 디지털 콘텐츠를 NFT로 인증하기만 해도 충분하다.
출처: 박대민(2021). NFT 아트 : 예술계의 탈중앙화와 흔적의 아우라. <한국언론정보학회>. 109호. 127-1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