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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사빠 Nov 09. 2017

#2.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준 남자

본격적인 연애 뒷담에 앞서서 친구 B에 대해서 간략하게라도 설명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B는 고등학교 때 친구따라 강남 간 격으로 이과생이 됐다. 노력형 이과생이었기 때문에 해도 안되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모의고사 수리 '가'형(선택형 수리영역 가형을 응시하면 다수 대학교 이공계 학과에서 가산점을 받을 수 있음)에 약했다는 것이다. 노력형 이과생이라는 게 무엇이냐 하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B는 수학의 정석 수1 책의 세 모서리가 시커매지도록 문제를 풀고 또 풀었다. '왜'라는 것 없이 문제 유형, 그에 따른 문제 풀이 방식을 습관처럼 몸에 익을 때까지 풀었다. 특히나 생소한 개념이었던 '로그와 지수' 편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아무튼 친구랑 같은 반이 될 확률이 높다는 이유로 이과에 간 그녀. 결국에는 수리 '나'형을 시험 치고 당당하게 수리 1등급을 맞아 생물학과에 입학했다. 왜 생물학과 였냐면, 생물을 잘하기도 했지만 원대한 꿈이 있었는데. 희귀한 난초들을 유전자 복제, 판매해서 부자가 되겠다는 거였다. 하지만 친구따라 이과생이 된 그녀에게 실제로 마주한 생물학과는 너무도 어려웠다고 한다. 친구 B가 말하기를 "한국어로 설명돼이었어도 모를 내용이 영어로 쓰여있으며, 심지어 영어로 강의를 한다. 그냥 포기하라는 말을 돌려 말하는 거 같다"고 했다. 그렇게 그녀는 복수전공으로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했다. 이유는 더 간단했다. B 왈 "취업난인 이 시기에 사회복지학과는 졸업하면 사회복지사 자격증 2급을 준대. 등록금을 한 학기에 500만원씩 잡고, 총 8학기 4000만원 내고 아무 것도 안 받는 것 보다 뭐라도 받고 졸업해야지!"

그랬던 B가 졸업 전 훌쩍 어학연수를 떠났다. 영어를 못하니까 중국어라도 잘해야 한다면서 옆나라로 언어를 배우러 가야겠단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B는 중국으로 가기 전 한 살 어린 썸남이 있었다. 6개월 넘게 붙어나니던 그 남자애와는 사귀지 않았다. 이유는 최근에야 들었는데, 그 친구는 당시 군 미필자로 어차피 군대를 가야하는데 본인은 중국에 가게 되고. 사귀는게 오히려 서로에게 마이너스라는 것이었다. (아하~) 다행히 그래서 지금도 서로 연락하고 지낸다고 한다.

아무튼, 썸남과는 중국에 도착해서도 한달 가량은 지속적으로 매일매일 통화하고 지냈다고 했다. 네이트온 화상 대화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다가 B는 같은 반 오빠에게 호기심이 생겨버렸다.

첫번째 이유: 5등신이었다. 키가 작고 뒤뚱거리는 모습이 곰돌이 푸우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두번째 이유: 일본에서 산 경험이 있어서 일본어가 매우 유창했다. 룸메이트가 일본인. 처음 봤을 때 일본 사람인줄 알았다고 한다.

세번째 이유: 일본어를 잘해서 한자를 많이 알았기 때문에 중국어를 읽고 듣지는 못해도 쓰고 해석은 가능했다고. 그래서 중국어의 기본인 성조도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2학년반에 배치된게 신기하더라는 이상한 B만의 생각.

그렇게 호기심은 호감으로 바뀌었고, 그 '푸우' 오빠 생각으로 잠못이루는 날도 많았다고 B는 말했다. 물론 한국에서 이런 사실을 하나도 모르는 썸남에게는 무척 미안했다고도 말했다. 사실 썸남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화통화로 '푸우'에 대해서 한마디도 안했을 B가 아니다. '우리 반에 곰돌이 푸우 닮은 사람 있다? 되게 신기해. 일본어도 잘해.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인 거 같아.' 100% 말했다에 한 표다.

B는 학기 초 그 오빠에게 고백을 받고 사귀기 시작했다. 드넓은 중국 대륙의 한 대학교 캠퍼스에서 봄에는 꽃가루 알레르기, 황사를 무릅쓰고 데이트를 즐겼고, 북경 곳곳을 돌아다녔다. 여름방학에는 중국 내에 있는 다른 도시로 여행을 떠났고, 10월 국경절에는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을 보러 몽고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함께 보낸 두 사람은 한국에 와서도 1년 가량을 더 만났다. B가 취업하기 전까지.

아! 그 전에 B와 푸우를 함께 만난 적이 있다.

"우리 같이 애견카페에 갈래? 남자친구도 소개해줄겸 같이 가자!"

"그래도 될까? 불편해하면 어떡하지?"

"에이, 걱정마! 낯 가리는 성격 아니야."

낯 가리는 성격이고 뭐고, 첫 인상은 B가 말해준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날 강한 인상을 남긴 건 딱 한 가지였다. 그 남자는 B의 말이라면 뭐든 OK였다는 거. "오빠, 이거 좀" "오빠, 저거 좀"

마치 여왕님을 모시는 신하같았달까.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중소기업에 취직한지 3주 정도가 됐으려나? B를 만났다. 회사 생활은 어떠하냐고 물었더니 같은 부서에 있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낸다고 했다. 특히 나이차이가 꽤 많이 나는 대리 한 명이 잘 챙겨준다고 했다. 이 부분에서 나는 '혹시?'하는 마음이 생겼는데 '역시나'로 되돌아왔다.

"어떡하지, 나? 저녁을 같이 먹었는데 나를 좋아한대. 아무래도 이 사실을 숨기는 건 너무 비겁한 거 같아. 푸우한테 말해야겠어."

일단 뜯어말리고 침착하게 설명해보라고 했다. 당시 B의 설명이다.

한국으로 돌아와보니 푸우는 더이상 귀여운 푸우가 아니었다. 술과 담배, 놀기를 좋아하는 한량중의 한량일 뿐. 자기개발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회사에 입사하고 보니... 그 대리라는 사람은 미래에 대한 계획이 있어보였고, 대학원도 다니는 등 자기자신에 투자하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 푸우에게 마음이 서서히 식어가고 있는데 회사 사람이 들이대니 (굳이 그 대리가 아니어도 회사에 그런 멋진 사람은 많았다는 말도 했었음) 식어가는 게 아니라 차가워서 얼어가는 중이었겠지.

결국 ! 2년 넘게 만난 푸우에게 B는 이별을 고했다. 잔인하게. 의도는 잔인하고 싶었던 게 절대 절대 절대 아니었지만 그렇게 됐다.

B는 모든 것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그녀의 행적들을 봐도 알 수 있듯(친구가 좋아서 하루만에 이과로 결정내림. 생물 과목 잘한다는 칭찬+고가의 희귀난초 이야기에 생물학과 결심. 자격증 나온다는 말에 사회복지학과 복수전공 등)헤어져야겠다고 말한지 얼마 되지 않아 헤어졌다고 연락이 왔다.

이별하기로 결심한 날, 그녀는 약속 장소에 한시간 먼저 도착해서 푸우에게 줄 선물을 골랐다. 뭔가 그동안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때문에 선물을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편지지 두장에 헤어짐의 이유를 적은 뒤 커플링을 넣고 동봉했다.

이유는 심플 그 자체였다. '만날수록, 마주할수록,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미안한 마음이 커진다. 이건 사랑이 아니다. 미안해서 만나는 건 너에게도 나에게도 못할 짓이기에 우리는 헤어지는 것이 맞다'

B가 회사 대리에게 한눈 팔아서 그런 거 아니냐고? '아니다'

대리 덕분에 푸우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는 속도가 빨라진 건 맞지만, 대리와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깨달은 건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이다. 회사에 취직을 하고, 서울 출퇴근을 하다보니(환경이 바뀌고 보니) 세상에는 멋진 사람이 너무나도 많고 그에 맞게 안목이 변했다는 것. 다른 말로 해보자면, 푸우에 대한 콩깍지가 벗겨졌다는 말이 된다.

헤어지던 날, B는 속으로는 너무나도 떨리고 미안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웃으며 즐겁게 밥도 먹고 차도 마셨다. 그리고 집에 가기 전 준비했던 선물과 편지를 전하며 집에 가서 꼭 읽어보라고 신신당부한 뒤 뒤도보지 않고 버스에 올라탔다. 핸드폰도 껐다. 한달동안 문자와 전화가 빗발쳤지만, 절대로 받지 않았다. 그게 푸우에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고 B는 말했고, 나는 이별 매너가 없던 거 아니냐고 다그쳤다.

"그 사람은 나에게 너무 잘해줬고, 나는 그 사람한테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커서 구구절절 헤어질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동정심에 다시 만날 것 같았어. 그게 너무 무서웠어.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데 미안하다는 이유로 만나야한다면 그 시간이 너무 지옥같을 거 같아서 아예 차단해버리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어. 나도 내가 나쁜년이라는 걸 잘 알지만, 그게 우리에게 최선이었어. 만나서 말했다면 걔는 나를 놔주지 않았을 거야. 며칠 지나니까 저주 문자가 오더라. 구구절절한 내용을 보다가 그 문자를 보니까 숨통이 트이더라. '와, 다행이다' 싶었어. 이별 앞에서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어..."

이별 앞에서는 모두가 이기적이다...? 글쎄,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별 앞에서는 이기적이어야한다는 B의 말에 동의한다. B가 이별을 코앞에 두고서도 상대방이 힘들어할까봐 배려한답시고 푸우를 만났다고 생각해보라. 그리고 동정심에 자신을 만났다는 걸 푸우가 나중에 알게 됐다면? 자신을 능멸한 B에 대해 감정이 더 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상대방이 힘들어할까봐 오는 연락 다 받아줬다면 그거야 말로 되도 않는 '희망고문' 아니겠는가.

감정 앞에 필요이상으로 솔직한 B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 건 1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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