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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착함은 어떻게 무능함이 되는가

자본주의 속 진정한 선에 대하여

by 변대원

나는 오랫동안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예전에 비해서 착해지려 애쓰지 않는다.

착함은 모든 아이들의 가장 중요한 평가기준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세상은 착함이 아니라, 능력을 기준으로 평가하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착함은 쉽다.

양보하면 된다. 져주면 된다. 내가 손해 보면 된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그런 사람은 호구가 된다.

가치관의 혼란이 온다.

양보하는 게 더 우월한 가치이고, 내가 손해 보더라도 전체에게 기여하는 것이 분명 더 숭고한 것인데,

세상은 얄밉게도 그 양보를 받고 내 기여를 받아간 누군가를 더 높게 평가한다.

하여 우리의 착함은 자칫 무능함이 되기 쉽다.


낮은 단계의 착함은 그런 것이다.

착함에 상대만 포함되어 있고, 내가 빠져있다.

이걸 모르면 평생 호구가 된다.

끊임없이 자기 비하와 착취만 하면서 살게 된다.

내가 힘든 게 사실은 스스로 만든 것임에도 그걸 모른다.


진정 선(착함)은 한쪽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나에게도 이롭고, 상대에게도 이로워야 선이다.

이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자존감이 세워진다.

선을 보는 기준이 넓어지는 것이다.


내가 양보하는데, 내가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양보는 결코 선이 아니다.

내가 손해 보는 게, 나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원치 않는 희생이라면 그건 선이 아니다.

진정한 선은 결코 비굴하지 않기 때문이다.

힘이 약해서 힘 센 녀석에서 무언가를 양보하는 것을 어떻게 미덕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높은 단계의 선은 가치를 기반으로 한다.

그 가치의 종류는 여러 가지다. 타인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능력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일을 잘하는 것, 운동을 잘하는 것, 책을 잘 읽는 거나 공부를 잘하는 것도 가치가 된다.

지금은 맛집을 많이 아는 것도 가치로 인정받을 수 있는 시대다.

즉, 내가 가진 가치로 타인을 이롭게 하고, 동시에 나 자신도 성장하는 것, 그것이 진짜 선이다.


누군가는 값비싼 가구를 판다.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런 걸 누가 살까 싶지만, 어떤 이에게는 돈이 많아도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런 이들에게 그런 가구는 희귀템이 되어 가격과 상관없이 잘 팔리기도 한다.

가치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싼 가구를 파는 것도 높은 수준의 착함이 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배운 어린 시절 아름다운 동화 속에서는 "착하기만" 해도 괜찮지만,

실제 우리가 사는 현실(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능력 자체가 선이 된다.

물론 더 멋진 건 능력도 있는데, 겸손과 선량함까지 겸비한 것이겠지만.


그런 사람을 나를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착한 사람은 그만하고,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가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더 열심히 성장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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