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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푸리 May 09. 2020

남돌은 되고 여돌은 안 되는 것

열병과도 같았던 첫 아이돌 덕질은 조금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탈덕의 계기라고 할만한 일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일은 그저 적당한 핑계였을 뿐이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었다고 할까. 예전만큼 열띤 감정이 생기지 않았고 많이 지치기도 한 상태였다. 그래도 최애의 리즈 시절을 함께한 것에 위안을 삼으며 미련 없이 털고 나왔다.


탈덕 이후 한 발짝 떨어져서 아이돌판을 바라보게 되었다. 기존의 트위터를 모두 정리하고 새로운 판을 짰다. 세상이 그 아이와 그 아이가 속한 그룹으로만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세상엔 정말 많은 아이돌이 있었다. 사실,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마음과 시간에 여유가 생기니 자연스럽게 시야가 넓어졌다. 바야흐로 아이돌 ‘간잽기’(한 아이돌에 정착하지 않고 두루두루 간을 보는 시기)가 시작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걸그룹의 세계에 새롭게 눈을 떴다. 계기는 단순했는데, 그즈음 프듀의 새 시즌이 시작된 것이다. (이쯤 되면 그냥 엠넷의 노예다.) 세 번째 타이틀인 <프로듀스 48>의 주인공은 남자가 아닌, 여자 아이돌이었다. 프로그램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당시 활동하고 있는 걸그룹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레드벨벳, 마마무, 오마이걸, 트와이스, 블랙핑크, 우주소녀, 여자친구, (여자)아이들 등 저마다 뚜렷한 색깔을 가진 걸그룹이 군웅할거(群雄割據) 하던 시절이었다.




남돌을 파다가 여돌판으로 오게 되면 가장 적응 안 되는 게 무대 의상이라는 말이 있다. 짧아도 너무 짧고 타이트해도 너무 타이트하다.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의상은 종종 보고 있기 민망할 정도다. 칼바람 부는 연말 시상식의 야외 레드카펫 행사 때마저 별반 차이가 없는 의상을 보고 있자면 일종의 학대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겨울 코트까지 야무지게 챙겨 입은 남돌과 달리, 여돌은 미니스커트는 기본이고 얇은 블라우스나 어깨를 드러낸 오프숄더를 입고 추위에 오들오들 떤다. 단 1g의 지방도 용납하지 않는 의상 탓에 여돌의 다이어트는 극한의 경지에 이르렀다. 남돌이든 여돌이든 다이어트는 아이돌 세계에선 피할 수 없지만 여돌의 경우는 노출이 많은 의상 때문에 한층 잔인한 피드백이 있을 수밖에 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품평의 대상이 된다. 살이 쪄도 안되지만 너무 말라도 걱정을 빙자한 비난이 쏟아진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친  2018년 서울가요대상. 마마무와 비투비의 의상은 같은 날이라고 믿기 어렵다.


<슈가맨>과 같이 예전에 활동했던 연예인을 찾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매번 놀라는 것은 여자 연예인들의 똑 부러지게 관리된 모습이다. 10여 년이 지났는데 현역 때와 큰 차이가 없는 외모와 몸매를 보여주고 간혹 그때보다 한층 더 나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남자 연예인의 경우 은퇴 이후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활동 몇 년 차만 돼도 쉽게 망가져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현실과는 대조적이다. 그 이유가 여자 연예인은 활동 내내 상상을 초월하는 가스 라이팅에 시달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시장 안에 있는 것 같지만 남돌과 여돌의 소비층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이는 음반과 음원 판매량으로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다. 2020년 5월 5일 기준 역대 앨범 초동 판매량(발매 후 일주일 동안의 판매량) 20위 안에 걸그룹은 없다. 50위 이내도 아이즈원(23위)뿐이고, 100위로 확대해야 트와이스, 블랙핑크, 아이유, 태연, 소녀시대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200위까지 해도 추가되는 이름은 레드벨벳, 마마무, 문별, 에프엑스, 여자친구, 아이오아이가 전부다. 아이즈원 정규 1집이 초동 35만 장을 판매하기 전까지 걸그룹의 최대 판매량은 트와이스 미니 8집의 15만 장이었다. 참고로 통산 1위 방탄소년단이 초동 330만 장이다.


그런데 음원 성적을 보면 음반과 같은 심각한 쏠림 현상은 잘 발견되지 않는다. 멜론 진입 이용자 수(2017년 차트 개편 이후)를 살펴보면 20위 내에 남돌의 음원은 11곡, 여돌의 음원은 9곡이 있다. 가수로 따져봤을 때는 정확히 반반이다. 대체로 여돌은 음반에 비해 음원의 성적이 더 좋고 남돌은 그와 정반대의 경향이 나타난다.


남돌의 음반 판매량은 여돌에겐 넘사벽이다.
반면, 음원은 큰 차이가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음반 구입은 팬덤이 완전히 장악한 반면, 음원은 대중의 소비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남돌은 팬덤 관리만 잘하면 되지만 여돌은 대중의 눈치도 봐야 한다. K팝의 팬층이 넓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주 소비층이자 가장 열광적인 집단은 10대 여성이고, 그들 중 다수가 남돌 팬이라서 그렇다. 아이돌이 말실수나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를 떠올려 보자. 여돌은 공개적으로 기자 회견까지 열어 사과하지만 남돌은 어영부영 넘어간다. 남돌이 사과하지 않는 건 사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남돌은 일단 방어막을 치고 보호하는 팬덤 뒤로 숨을 수 있다. 반면, 남돌과 팬덤 규모에서 현격한 차이가 나는 여돌은 대중이나 타 팬덤의 공격으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받을 수가 없다. 예전에 어떤 방송에서 한 여돌이 다시 태어나도 아이돌을 하고 싶지만 그때는 남돌이었으면 좋겠다고 한 말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최근 K팝 팬덤의 변화는 그래서 반갑다. 몇몇 남돌이 연일 사건사고를 터트리며 팬덤에게 실망과 충격을 안겨주는 와중에 여돌의 재평가가 다방면으로 이루어졌다. 엠넷 경연 프로그램 <퀸덤>을 통해 보여준 무대 장악력, 팬들에 대한 성실하고 한결같은 태도, 남돌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윤리 의식과 직업 정신 등이 조명되었다. 그리고 아이즈원과 같이 남돌 못지않은 팬덤을 가진 여돌도 등장한다. 정규 1집 발매를 앞두고 터진 ‘프듀 조작 사태’가 ‘한 처먹기’라는 K팝 덕후의 극강 치트키를 발동시키긴 했지만, 여돌에겐 넘사벽이라 일컬어지던 앨범 초동 20만 장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현재 5월 음원 차트에서도 에이핑크, (여자)아이들, 오마이걸 등 걸그룹이 초강세이다. 6월 1일에 9집 미니앨범으로 돌아오는 트와이스가 과연 어떤 기록을 낼지 벌써부터 흥미진진하다. 고인물은 썩기 마련이고, 드디어 누군가에게 그토록 기다리던 때가 왔다.


2015년 이래 지금까지 다양한 변주를 통해 큐티 콘셉트의 영역을 확장해 온 오마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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