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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디자이너 Dec 14. 2021

시어머니의 아지랑이


시어머님이 지난 간 곳에는 광이 난다. 그녀는 어떠한 잔소리 한번 없이 13년 동안, 나의 그늘진 곳을 구석구석을 닦아 주었다.



첫째 아이를 낳고는 어머님이 산후조리를 직접 해주고 싶다고 했다. 한 달 정도 우리 집에 함께 지내며 세끼 밥에 간식, 청소, 빨래, 아이 목욕, 재우기, 기저귀 갈기까지 모조리 도맡아 했다. 누워있기 죄송해 뭐라도 거들라 하면 찬바람을 쐐거나 손에 물을 묻히면 산후풍이 온다며 한사코 말렸다. 그때 어머님이 집 안 일하는 걸 보며, 살림을 배웠다.



아이 돌 때쯤 되어 복직한다고 하니, 여자도 일해야 큰소리친다며 아이를 2년간 키워주었다. 시어머님은 아이들 눈높이에서 잘 놀아준다. 그래서 시댁에 가면 아이들은 어머님과 노느라 나는 찾지도 않는다. 밥을 먹을 때도, 놀이할 때도,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아이들은 어머님만 쫓아다닌다.  



가끔 부부 싸움하고 어머님께 전화해 하소연을 하면 '어쩜 하는 짓이 지 아버지와 똑같니'하며 내 편을 들어준다. 그러면서 내 말에 맞장구를 쳐준다. '아이고 그렇지.', '그랬구나', '그럼, 그럼' 그렇게 다를 떨면 남편에게 서운함이 사라진다. 어쩔 땐 싸움에서 자꾸 지는 내가 안타까운지 싸우는 법도 알려준다. 자꾸 그러면 ‘여태 살고도 나를 몰라?' 이 말 한마디만 하라며 코치한다.



결혼 10년 차 때는 아이들을 시댁에 맡기고 남편과 여행을 다녀오라고 하며 내손에 용돈을 쥐어줬다.

“결혼 후 단 둘이 여행 가는 거 처음이잖아, 그동안 고생 많았어. 잘 챙겨주지 못해 미안해, 이걸로 가서 맛있는 거 사 먹고 구경도 잘하고 와. 애들 걱정하지 말고.”



친구들이 모여 시댁 흉을 볼 때면 나는 말없이 앉아 있다. 칭찬 거리가 더 많아서다. 그래서 남편은 어머님이 해주는 것에 비해, 마음뿐인 내가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어머님을 대신해서 생색내는 남편이 미울 때도 있지만 어머님이 만져주는 사랑의 힘으로 남편을 다시 보듬게 된다. 남편에게 아직 콩깍지가 벗어지지 않는 건 순전히 어머님 덕분이기도 하다.



시어머님은 99세가 되신 시 할머님을 모시고 사는데 가끔씩 젊을 때 호된 시집살이에 대해 말한다.


“살던 집이 산골이라 수도가 없었어. 아랫 동내 가서 물을 길어다 밥을 지었어. 만삭이라 배가 남산만큼 나와서 물지게를 양쪽에 매고 언덕을 오르는데, 배에 무릎이 닿는 거야. 그때 참 힘들었어.”


그래서 절대로 며느리에게 시집살이시키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어머님은 때마다 밑반찬과 각종 김치를 해서 나눠주기 바쁘다.  나는 늘 시댁에서 두 손, 마음 가득 받아오고 무엇을 해드릴 수 있는지 고민이다. 어머님은 잘 사는 것만으로 효도하는 거라고 하는데 정말 그런 건가 싶다.




이바라기 노리코의 <어린 소녀는 생각했었지>란 시를 읽고 시 안에서 어머님이 느껴졌다.



출처: Pinterest



어린 소녀는 생각했었지
아줌마들의 어깨는 왜 저렇게
은은히 풍겨 올까 하고
물푸레나무처럼
치자나무처럼
아줌마들의 어깨를 감싸는
저 아늑한 아지랑이 같은 것은 무엇인가를

   



시댁에 처음 인사하러 간 날, 아파트 입구부터 온기가 달랐다. 거실에 거하게 차려진 상에는 손수 만든 음식들로 가득했다. 잡채, LA갈비, 육개장, 각종 전 들, 계절 나물, 막 지은 윤기 흐르는 쌀밥까지. 아버님은 후식으로 사과와 배를 직접 깎아 주었다. 집안 가득 편안한 웃음소리와 따뜻함에 묻혀 가족 모두가 평온해 보였다. 아늑함이 느껴졌다.



그날 주방에 서 있는 어머님 뒷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어머니 등에서 아지랑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버님과 자식들이 어머님 양쪽 어깨를 기대어 편히 쉬고 있는 모습이 느껴졌다.




친정엄마는 내가 초등학생 때 아버지와 이혼 후, 홀로 4남매를 키우느라 장사를 했다. 늘 바쁜 엄마와 집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먹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날의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으로 남았던 것 같다. 이후 어머님 같은 따뜻한 아내와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아줌마들의 어깨에 내려 쌓이는
저 마음결 고운 것은
하루 또 하루
남을 사랑하며 살기 위한
그저 그러한 피로였다고




나를 위해서까지 기도해 주는 어머님의 따스함이 내 몸을 감싸 안는다.


새벽에 너를 놓고 기도 하는데, 얼마나 눈물이 났는지 몰라. 아들과 잘 살아줘서 고맙다."


고단함에도 며느리인 나까지 기꺼이 안고 가며 기댈 수 있는 어깨를 아무런 계산 없이 내어 준다. 어머니는 많이 배우지 못해 한글도 못 쓴다며 부끄러워하지만 그것이 절대로 흉이 되지 않는다.


나는 누구보다 어머님을 존경한다. 성품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배운다는 걸 어머님과 어머님이 키운, 남편을 보면서 깨닫는다. 나도 마음결을 갈고닦아, 언제든 아이들이 쉬어 갈 수 있는 편안한 어깨를 내어주고 싶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기도로 대신하는 시어머님의 삶 속에서 엄마 되는 법을 배운다. 시어머니의 아늑한 아지랑이를 느끼며 나는 한 뼘씩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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