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숍을 가면 나는 말이 없는 편이어서 미용사와 수다도 떨지 않고 실습용 두상마냥 가만히 있는 편인데, 그래도 가끔은 사는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다.
작가라는 게 아무래도 생각을 담는 직업이다 보니 사람들 인식 속에서도 종종 생각과 생각을 잇는 사람으로 여겨지곤 해서, 미용사들도 내가 작가라는 걸 알고 나면 본인의 인생 역경, 현재 샵에서 일하며 겪는 어려움, 미래에 대한 비전 같이 평소에는 말하기 쉽지 않은 주제를 꺼내 놓는다. 어떨 때는 '이런 이야기까지 들어도 되나' 싶을 정도의 속사정을 들을 때도 있는데, 나는 그 이면에 어떤 '허기'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내가 살아온 결과에 대해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기분. 대단하지는 않을지언정 부끄럽지 않게 살았고 때로 어려움을 감수해가면서까지 지켜낸 '나'의 지금을 스스로 믿어도 되는 것인지 확인받고 싶은 마음.
확실히 어른들은 '칭찬'에 굶주려 있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어른이 되어 칭찬을 들은 게 대학 시절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사회에 나와서 뭔가를 잘하면 어떤 대가가 주어지거나 평판이 좋아지는 것처럼 간접적인 격려는 이어져도 콕 집어서 '너는 참 무엇을 잘했구나'라고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건 세상이 각박하다거나 사람들이 칭찬에 인색해서 그렇다기보단,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기 영역에서 경험치가 쌓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지지하는 가치도 제각각 달라지기에 어떤 점을 칼로 무 자르듯 평가하기가 힘든 탓이 크다. 더구나 어느 순간부터는 소위 '머리가 굵어서' 내게 '뭘 못했니 뭘 잘했니' 평가할 자격을 갖춘 사람도 점점 사라져 간다. 학생 때야 내가 선생님보다 아는 게 없지만, 커서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선생님보다 아는 게 많아지면 더 이상 나를 가르치지 못한다.
한날은 활동 중인 플랫폼에 내가 쓰고 있는 소설에 대한 고민을 올렸더니 나와 자주 소통하던 독자 한 분이 댓글을 달았다. 그녀는 투자회사에서 근무하며 수없이 많은 자문을 하는 사람임에도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한 자문은 받지 못했다고 한다. 실은 비슷한 질문과 고민을 전에도 몇 번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은 사회에서 꽤 성공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런 고민에 더 취약하다는 점이다.
직업이나 하는 일에 상관없이 사람의 됨됨이는 모두가 공통된 것이기 때문에 두루뭉술하게 '당신 참 그런 모습이 좋네요'라고 할 수 있지만 누군가의 인생을 보고 '당신 참 인생 잘 살았네요'라고 단언하기는 매우 어렵다. 정말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잘됐냐', '잘못됐냐' 나눌 수 있겠는가. 신이 아닌 바에야 애초에 타인의 인생을 다 알지도 못하지만 또한 인생의 기준은 정말 모호하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많은 재산이 성공의 기준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훌륭한 명예가 성공의 기준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는지가 성공의 기준이 된다. 기준과 실제는 늘 괴리가 있는데 기준이 높아질수록 그 경지에 오른 사람은 점점 적어지고 다른 분야까지 포용할 수 있는 통찰력은 더 기대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래서 10년 전쯤에는 누구나 존경하는 사회적 명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인생의 방향을 묻고 조언까지 구하는 '멘토 열풍'이 불기는 했지만 얼마 안 가 그도 시들해졌다. 모든 걸 통찰하고 삶의 정확한 부분을 짚을 수 있는 훌륭한 분이 있다고 해도 그 앞에 서면 내 옆에 이미 수천수만 명의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자기계발서나 위인의 잠언을 읽고 감명받는 일과 크게 다른 점이 없다. 그러므로 어른들에게는 그런 비현실적인 인정보다는 내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구체적으로 칭찬해줄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하다.
tvN의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을 보면 칭찬받고 싶은 어른들의 갈망이 대중 매체에 고스란히 반영 돼 있는 걸 볼 수 있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일하는 '자기'들을 모셔와 자기 분야에서의 삶과 애환을 토로하고 그 자리에 앉기까지 자기 자신이 일군 것에 대해 '자기 인정'을 받는 시간. 길거리에서 마주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출연 대상이 될 수 있는 만큼, 칭찬에 목마른 어른들에겐 같은 그룹의 사람이 인정받는 과정을 본다는 게 대리만족을 넘어 자기효능감까지 채우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물론 <유 퀴즈 온 더 블럭>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유명인과 전문직 종사자와 같은 '평범한 우리들'과 거리가 먼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처음 대중들에게 어필했던 좋은 의도는 많이 상실한 상태지만,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여러 사람들과 공감하는 담론의 장을 열었다는 점에선 큰 의미를 주지 않았나 싶다.
"로스쿨 다닐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너는 나한테 강의실의 위치와 휴강 정보와 바뀐 시험 범위를 알려주고 동기들이 날 놀리거나 속이거나 따돌리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해. (중략) 너는 밝고, 따뜻하고,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야. 봄날의 햇살 최수연이야."
어쨌거나 칭찬에 목마른 어른들인만큼, 불현듯 찾아오는 칭찬의 위력은 생각보다 클 때가 많다. 내가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는 솔직 담백한 우영우가 동료인 최수연에게 대뜸 칭찬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드라마 속의 최수연 변호사도 그렇지만 보는 나까지 눈물이 핑 도는 게 아닌가.
최수연은 우영우를 도울 때마다 자기까지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이상행동을 보이는 우영우를 차마 지나치지 못하고 도울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탓할 정도였지만, 당사자인 우영우에게 그런 행동의 당위성과 파급력을 듣게 되면서 스스로 그 행동의 가치를 깨닫는다. 말 한마디에 스스로 감내해야 했고 애써 숨겨왔던 좋지 못한 그 모든 일들에 의미가 생겨난 것이다.
어른이 되어 살아간다는 게 때로는 좋은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이 한데 섞여 결과를 이뤘음에도 내내 마음 한 편이 찝찝한 일들도 있고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낼 수 없는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어른들에게 필요한 칭찬이란 당장 겉으로 보이는 좋은 면에 대한 부각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좋은 사람' 혹은 '좋은 인생'을 만들기까지 감수해야 했던 어떤 일들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일지도 모른다. 헤어숍에서 들었던 이야기도, 사람들이 내게 들려주었던 그 많은 역경도 결국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어른들이 갈망하는 칭찬의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는 듯 하다. 한 사람의 행동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그 사람의 삶을 깊이 있게 통찰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칭찬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대단한 위인이나 빼어난 대가가 아닌 내 친구나 가족, 나의 삶을 쭉 지켜봐 왔던 모든 사람들이 곧 내게 '최수연 앞의 우영우'가 될 수 있다.
아직은 세상 분위기가 서로에게 칭찬하는 일이 낯 뜨거운 일처럼 느껴져서 나도 얼마 전에 친구에게 우영우처럼 칭찬을 건넸다가 '손발이 오그라든다'며 핀잔을 듣기는 했지만, 그 친구나 나나 서로에게 했던 잊히지 않는 격려 하나쯤은 갖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나의 지난날까지 긍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칭찬이, 그런 칭찬을 좀 더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전에 내가 먼저 타인의 장점을 발견하고 칭찬받을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 생각해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