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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민 Apr 27. 2024

위염에 걸려도 커피는 마신다



요 며칠 위염 증상 때문에 고열과 오한에 시달리며 고생 좀 했더니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너는 아무래도 커피 중독인 것 같다. 커피를 좀 줄일 수는 없겠느냐고.


인정한다. 나는 보는 사람들마다 항상 '커피 좀 그만 마시고 물 좀 마셔라' 핀잔을 듣는 못 말릴 카페인 홀릭이다. 이십 대엔 카페에 가게 되면 샷을 추가해서 먹었는데 그나마 최근엔 건강을 생각해서 많이 줄이기는 했다. 실제로 몸에 잘 안 받는다는 기분도 들고 말이다. 


어쨌거나 내려먹는 아메리카노든 길거리에서 파는 캔커피든 사무실에서 타먹는 노란 믹스 커피든 일단 눈앞에 갖다 주면 다 입으로 털어 넣어버리니 중독은 중독이다. 지금도 위염이 낫자마자 바닐라 라테를 홀짝거리며 글을 쓰고 있으니.


커피 때문에 밤새 불면에 시달리고 남들이 눈뜨고 출근하는 아침에 멜랑콜리한 기분으로 새벽바람을 맞기도 하지만 내게는 그만한 삶의 동기도 없다. 사람은 궁극적으로 자기 성장과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얻는 기쁨으로 살지만 잠들기 전까지 눈을 뜨고 있는 하루 동안의 행복은 그날의 보상이 좌우한다. 


나는 커피 이외엔 술과 담배도 하지 않으며 사람을 잘 만나지도 않는다. 여행을 다니거나 게임을 한다거나 하는 취미도 요즘은 즐기지를 않으니 내 말마따나 속세에 나온 스님이나 다름없는 삶인 것인데 커피도 마시지 못하면 무슨 낙으로 살아야 하나? 마지막 남은 즐거움인 커피가 있어야 살 수 있는 삶이라면 타협은 할지언정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줄이기는 하겠지만 커피는 계속 마시게 될 것이라고 나는 조용히 고집을 피웠다.


'화장실 허락 좀 그만 맡으라' 사장에게 지적당하는 레드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면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온갖 물건을 밀반입해주는 만능 장사꾼 레드가 몇 번이나 가석방 심사를 실패한 끝에 겨우 감옥을 나와서 '불편한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하는 마트에서 성가실 정도로 사장에게 '화장실 좀 다녀와도 돼요?'라고 묻는 본인은 한평생 간수의 지도를 받으며 살아왔고 허락 없이는 오줌 한 방울도 못 눈다고 한다. 자유는 있지만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달라져 버린 게다. 


결국 이전에 감옥 도서관 사서로 잘 지내다가 예상치 못한 가석방을 맞게 된 동료가 목을 맨 그 방에서 레드도 똑같이 목을 매려고 하지만, '당신의 능력이 필요해요'라고 했던 옛 동료 앤디의 말이 생각나 결국 다시 법의 테두리를 나가 그를 찾아 나선다. 정작 감옥에 갇혀있을 때는 자신의 뜻대로 하다가 자유의 몸이 되어 법의 테두리에 갇혀있을 때는 코찔찔이처럼 나이 예순에 사장님에게 바지춤 올리는 것조차 허락 맡는 늙은이가 되어버린다면 어느 것이 더 진정한 자유 추구일까. 내용은 좀 다르지만, 내게는 커피 마시는 일이 그러했다. 


'바람직한 삶'으로 불면과 속 쓰림을 잊으려면 커피마저 끊고 '건강하고 유익한' 테두리 안에 갇혀있는 게 맞겠지만, 그러자니 살기가 팍팍하고 재미가 없을 것 같으니 조금은 선을 넘어보겠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세상의 테두리 안엔 놓을 수가 없는 자기 본성의 한 부분을 깨닫는 것이라고 해야겠다. 그게 커피라는 기호이든 뭐든 간에 말이다. 영화 <패신져스>에서도 주인공 오로라가 '커피가 없으면 뉴욕에 돌아갈래요'라고 하질 않나. 지구에서 아광속으로 90년이나 걸리는 우주 여행에 승객으로 탑승하면서 말이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내게 위염에 걸려도 놓을 수 없는 커피가 있듯이 사람들은 저마다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양식을 가지고 있다. 단순한 생활패턴에서 아름다운 꿈, 인생의 목표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이렇게 살면 역시 이상한가'라고 느끼기엔 자기 자신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들이, 당신에게는 있는가. 아마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과거 <파리의 연인>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배우 박신양이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인간의 양면성이나 폭력성을 다룬 작품에는 관심이 없느냐'는 질문에 딱 잘라 '관심이 없다'고 대답한 게 기억난다. 박신양은 자기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관객들이 영화나 드라마를 봤을 때 재미를 느낄만한 것이고, 관객들이 느끼기에 부정적으로 다가올 작품들을 '굳이 고통을 감내해서 봐야 하는지' 도리어 반문하곤 했다. 분위기에 취해서라도 적당히 원하는 대답을 내놓기 일쑤인 인터뷰에서 소신 발언을 한 셈이지만 그의 말을 곱씹어 보면 딱히 이상할 것도 아니잖은가. 사람들의 생각엔 모름지기 배우라면 히스 레저의 조커 연기처럼 극한의 광기를 다루는 게 멋있게 보일지 몰라도 해피엔딩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게 지양되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사실 우리는 이 같은 사유의 저변을 '탈구축(deconstruction)'이라고 하는 자크 데리다의 사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데리다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이항대립의 문제에서 이것과 저것이 아닌 그 문제 자체를 뒤집어엎는데서 진정한 해결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세상에 좋다는 것들은 많고 사람들은 그 틈바구니에 껴서 등수를 매기거나 편을 확정 지으려 하지만 그럴 일이 있을 때 한 발짝 멀찍이 서서 그 문제가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제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가끔 인터넷 커뮤니티에 '갤럭시가 좋냐 아이폰이 좋냐'라거나, '부먹이나 찍먹이냐' 같은 소리가 농담처럼 떠돌곤 했는데 어느샌가 이게 꽤나 진지해진 게 아닌가. 얼마 전 벌어진 '갤럭시남' 논쟁 같은 일이 좋은 예다. 나는 갤럭시 휴대폰을 쓰지만 애초에 전화통화만 되면 휴대폰을 잘 바꾸지도 않는다. 아이폰도 아이폰 나름 좋은 점이 있고 갤럭시도 갤럭시의 장점이 있다. 내 필요나 상황에 맞게 쓸 뿐이다. 탕수육 논란도 나는 찍먹파이긴 하지만 부먹파 친구와 그걸로 논쟁을 하다가 기분까지 상해야 한다면 이따위 논쟁은 없어지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장난스럽게 넘길 수 있는 이런 일은 낫지만 직업이나 정치 같은, 언급만 돼도 사람 이상해지는 무수한 논란들과 그 논란들이 만들어낸 '이상적인' 인간형에 대해 이질감을 느꼈으면 하루빨리 탈구축해버리는 것이 낫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에 관해 정답은 없다. 한 인생의 정답은 그 자신이 판단하는 것이지, 기준에 끼워 맞추는 게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사람들이 그 자신의 기호나 고유한 생각을 소중히 여기기를 바랄 뿐이다. 위염에 걸려도 커피는 마셔야겠고, 사람들이 뭘 하냐고 하든 글은 써야 하는 게 내가 가진 본질이다. 인생의 파도에 따라 자세는 바꿀 수 있어도 아마 그 자체가 바뀔리는 없는, 나는 뉴스나 소문보다 나의 인생이 좋다고 하는 것들에 좀 더 귀를 기울일 생각이다.






*본문 사진

-영화 <쇼생크 탈출>(1995)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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