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안 가득 케이크를 넣고 한 손에 닭다리를 든 채 우는 아이에 부쳐
입에 한 가득 넣으면 차가운 촉감이 혀에 달라붙는다. 어금니가 반투명 붉은빛을 가르면 달콤한 물이 말캉한 틈새로 터져 나왔다. 어릴 적에 푸딩은 세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음식이었다. 오감을 포박하는 그 달고 차가운 탄력의 유혹에 속절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먹어도 푸딩은 부족했다. 혼나게 될 미래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에베레스트를 오른 뒤에 9000미터급 봉우리가 있으면 오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에 찼다던 엄홍길 대장처럼 나는 있기만 하다면 푸딩을 무한히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의 야무진 꿈은 뷔페에 이르러 산산조각 났다. 혀는 꿀떡 넘어가버리는 달콤함이 아직도 아쉬운데, 배는 너무 쉽게 불러왔다. 어떤 이의 유치원에 다니는 조카가 생각났다. 그 애는 뷔페에서 입 안에 케이크를 잔뜩 넣고 한 손에는 닭다리를 든 채 문득 나라 잃은 듯이 울더랜다. “먹고 싶은 것은 많은데 다 먹을 수가 없어.”라면서. 이것은 꼬마의 귀여운 헤프닝만이 아니었다. 눈 앞에 헤아릴 수 없는 수의 푸딩이 있지만 우리의 위는 무한정 늘어나지 않는다. 일도 열심히 하고 놀기도 열심히 하고 싶지만 체력도 무한하지 않다. 어린이의 장래희망은 수십 가지이지만 선택의 기회도 무한하지 않다. 다시 말해, 그 아이는 뷔페에서 인간의 실존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고무줄 몸무게이다. 특히 마음고생을 시작하면 베이글 한 조각이라도 입에만 들어가면 유리조각처럼 서걱댄다. 안타깝게도(?) 최근엔 유난히 마음이 건강한지 이것저것 잘 먹으면서 지냈다. 이것저것 잘 먹는다는 것은 사실 겸손한 표현이다. 지난 달 근황을 이야기하는 때에 유난히 잘 먹었다, 라는 이야기를 반드시 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통통해진 몸으로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문득 깨달은 것은 먹으면 먹을수록 더 배고프다는 것이었다. 식욕을 채우려는 것은 인화물질로 가득 찬 빈 공간을 불꽃으로 채우려는 시도와 같았다. 허전함을 채우려고 시도하는 순간 공허는 태초의 우주처럼 폭발하고 팽창한다.
식욕을 줄이는 방법은 그것이 곧 지나간다는 것, 그리고 이미 충분히 먹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설명하는 수밖에 없다. 칼로리 일기를 써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몸은 알뜰하고 연비가 좋다. 내가 머리로 아는 것을 마음에게 조곤조곤히 이해시킨다. "초코바 하나만 먹어도 달리기를 두 시간은 거뜬히 할 수 있어, 그러니까 그만 먹어." 하지만, 이미 폭발한 태초의 우주에서 욕망은 그 커다란 입을 벌리고 쩌렁쩌렁하게 외친다. "오늘 먹을 치킨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라고.
입은 뒤가 트여있고, 위는 막혀있다. 유한한 위와 무한한 입을 지닌 인간의 아이러니한 운명은 우리를 선택의 기로로 내몬다. 뷔페에서 최고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선택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선택이 맛있는 음식과 맛있는 음식 사이에서 이루어진다는 데 있다. 이것은 가장 어려운 선택이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의 선택은 더할 나위 없이 쉽다.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사이에서의 선택도 비교적 쉽다. 더 나쁜 것을 피한다는 안도를 추구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것과 좋은 것 사이의 선택은 제법 고통스럽다. 저것도 달콤한 복숭아 향이 난다는 것을 아는데도, 눈 앞에서 떠나보내야 한다. 더 좋은 것때문에 행복하면서도 좋은 것을 잃은 짠함이 우리하다. 이 짠함을 오랫동안 이름 붙이지 못한 것은 모두 내가 국문과를 나왔기 때문이었다. 경제학과를 나왔더라면, 이것을 ‘기회비용’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뷔페의 역사는 기회비용과 그것의 아픔에 관한 역사였다.
만일 일생에 단 한번 뿐인 칠성급 호텔 뷔페 방문이라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이미 배가 너무나 부른데, 어린 제비들을 노숙자로 만든 제비집수프와 한 개에 이천칠백 만원이라는 유바리 멜론을 내놓는다면,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것의 맛을 알지 못하므로 위의 비명을 냉혹하게 외면한 채 그 진수성찬을 위로 밀어 넣을 것이다. 최소한, 전부 맛보기라도 할 것이다.
이런 미련한 행동에는 최고의 맛을 찾아내겠다는 열망이 도사리고 있다. 최고의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정보의 불균형이 빚어낸 참극이다. 설령, 무엇이 가장 인기 있는지, 어떤 사람들이 이것을 먹었는지 추천하는 평판 시스템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나의 취향까지 알지는 못하므로 결국에 먹어보는 수밖에 없다. 구글 어스로 전 세계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시대에도 여행을 가는 이유가 음식 때문인 것처럼, 먹는다는 것은 이렇게 오로지 스스로 해야 하는 전인격적인 체험이다. 전인격적인 것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삶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한 꿈이 되고 만다.
그러나 한 가지 좋은 소식은 무엇이 '가장' 좋은지는 알 수 없어도, '무엇'이 좋은지는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샤프 외길 50년의 장인이 만든 것이 아니더라도 지금 내가 집고 원하는 것을 쓸 수 있는 이 샤프가 좋은 것이다. 사향 고향이의 똥을 헤집어 나온 원두는 아닐지라도, 몽롱한 아침을 깨워주는 눈 앞의 커피가 좋은 것이다. 내 상처를 전면적으로 품어 치유해주는 사람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지금 나와 마주 앉은 이 사람이 좋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최고의 인생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살아가고 있는 이 인생이 좋은 것이다.
또 한 가지 좋은 소식은 우리는 소비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뷔페를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의 유일한 할 일은 선택뿐이었다. 그러나 삶을 이루는 대부분은 선택할 기회를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잔소리하는 엄마, 이렇게 생긴 코, 연교차 70도의 날씨, 발을 헛디딜 때 튀어나오는 욕이 모국어인 것이 그러하다. 물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오늘 저녁을 무엇을 먹을지, 지금 커피를 마실 것인지, 이 직장에서 일을 계속할 것인지, 나를 바라본 사람에게 미소지을 것인지, 선택지가 없는 채로 둘 것인지 선택지를 만들기 위해 분투할 것인지가 그렇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것인지는 언제나 판단 가능하다. 그러니 이제 뷔페에서 우는 짓따위는 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다. 더 좋은 것과 좋은 것을 구분하지 못하겠다면서 투덜대는 일은 그만하면 됐다. 그냥 내 앞의 이 식탁을 차리고, 사랑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