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서 내리자 다시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콧물이 찔끔 나게 춥기는 했지만 대설주의보가 내린 것치곤 귀여운 날씨였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정도였으니까. 괜한 걱정을 했구나, 하면서 착륙장에서 버스를 타고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화장실을 들렸다가 공항 밖으로 나서자, 진눈깨비가 그새 눈이 되어 내리고 있었다. 눈을 잘 볼 일이 없는 대구 사람이라, 눈이 무서운 걸 잘 몰랐던 나는 포실포실 내리는 눈이 마냥 예뼜다. 돌하르방과 우뚝 선 키 큰 야자나무를 보자 제주에 온 것이 실감 났다. 야자나무와 눈이라니. 재해의 현장 치고는 낭만적인 모습이었다. 들뜬 기분이 한 껏 고조됐고,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일이 닥치든 다 잘될 것이라는 낙천적인 생각이 발동되었다.
야자나무와 눈이라니. 재해의 현장 치고는 낭만적인 모습이었다.
눈을 잠시 구경하다가 그 애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시간 만에 목을 뚫고 나온 내 목소리는 꽤나 발랄했다. “야! 나 도착했는데, 아무래도 너 못 오겠지?” 그 애는 곤란한 목소리였다. “어, 그러네. 어떡하냐. 놀아주기로 했는데.” 나는 괜찮다고 했다. 솔직히 완전히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대구에서 제주로 날아오는 몇 시간 동안, 제주에 살고 있는 그 애가 마음만 먹었다면 공항으로 올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거니까. 여러 번 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내겐 타지인 이곳에서 고생을 할 나를 조금이라도 걱정했다면 어떤 수라도 마련을 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애에게 나는 그 정도의 노력을 쏟을만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조금 씁쓸했고, 아주 후련했다.
지난여름, 친구와 제주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우연하고 운명적인 계기로 그 애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쉽게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다. 꿈같은 휴가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서로 안부를 물으며 지냈다. 우리가 만난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시작될 때쯤, 그 애는 뜬금없이 “얘들아, 보고 싶다”는 말을 뱉더니, 진짜로 우리를 만나러 제주에서 대구로 왔다. 보고 싶다는 말에 그렇게나 충실하게 책임지는 남자는 오랜만이라 그 애가 더 멋진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 이후로 그 애는 한 번 더 “친구들아, 보고 싶다”하며 대구에 왔다. 우리는 저번보다 더 반갑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애의 짧은 방문은 현실인 일상 중에 갑자기 돌아온 꿈같은 휴가 같았다. 나는 그 애가 멀리에 두고 온 소중한 무언가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아련히 애틋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시시콜콜한 일상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기에 한참 동안의 일상을 살다 보면 그 애의 존재도 어느새 잠잠해지곤 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 애가 가물가물해질 때쯤, 그 애는 우리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날은 이전의 보고 싶다는 말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얘들아”, “친구들아” 가 아닌, “너”였다. “너”를 보고 싶어서 대구에 한 번 더 가겠다고 했다. 보고 싶다는 말에 충실히 책임을 져 온 그였기에 그 말에 기대를 갖게 되었고, 아주 설렜다. 그 설렘이 그저 멋진 사람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는지, 일상 중의 휴가 같았던 우리의 시간에 대한 좋은 기억 때문이었는지, 이성적인 관계로의 발전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이성적 관계에서 모 아니면 도를 추구하는 나로서는 그것을 확실히 아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우리의 ‘인연’이었던 그 애가 나의 ’ 연인’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이러한 이유들로나는혼자 제주에 오게 됐다. 나를 보고 싶다는 그 애의 말에, 나도 그 애가 너무 보고 싶어지는 바람에. 이래서 보고 싶다는 말에는 책임이 필요한 건데. 그 애는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그 책임을 지지 않았다. 내가 숱한 고민과 망설임을 지나, 검은 바다를 건너, 폭설을 뚫고 재해의 현장까지 왔는데도.그동안의 복잡함이 명료해졌다. 약간의 씁쓸함과, 확실한 후련함이 느껴졌다.이런 감정들이 내게 남은 것을 미루어 봤을 때, 이번 여행의 결심은 그 애의 보고 싶다는 말 때문이었을지 몰라도, 우여곡절을 감당하며 내가 마침내 이곳에 있는 진짜 이유는 그 애 때문만이 아닌 것도 분명해졌다. 이 대책 없이 저지른 여행은 미적지근한 한 해를 보낸 것이 못내 아쉬웠던 내게 던져준 자그마한 도전이자 모험이었으리라. 이제는 스물일곱을 잘 보내주고, 스물여덟을 의미 있게 맞이하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함덕에 잡아둔 숙소를 가기 위해 게이트 앞의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평소라면 버스 안내 모니터에 대기 시간이 10분 내외로 떴을 텐데, 대부분의 버스가 3-40분 이상이었다. 이모의 말이 실현되고 있었다. 3-40분 정도야, 기다릴 만한 시간이었지만 얼른 짐을 풀고 맛있는 저녁을 먹고 싶었던 나는 택시를 타기로 했다. 택시 정류장으로 갔더니 이미 긴 줄이 있었다. 내 앞으로 선 사람이 10명은 족히 넘었다. 평소의 제주공항이라면 많은 사람만큼, 많은 택시도 있어야 하는데, 많은 사람뿐이었다. 대기하고 있는, 또는 손님을 태워 나가는 택시는 단 한 대도 없었다. 20분, 30분이 지나도 내 앞의 줄은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한 두대 정도의 택시가 들어왔었고, 맨 앞의 몇 명이 그 택시를 타고 나갔고, 그 이후로 택시는 다시 오지 않았다. 긴 기다림에 지친 몇 명이 택시를 타는 것을 포기하고 줄을 벗어나 어디론가 갔다. 카카오 택시도, 콜택시도 잡히지 않았다. 희망을 갖고 기다리는 것 외엔 별다른 대책이 없었던 나는 하릴없이 줄을 서 있었다. 내 앞에는 여전히 6-7명의 사람이 남아있었고, 뒤로는 그 새 10명 이상의 사람이 더 줄을 섰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펑펑 내리던 눈은 “폭설”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눈보라가 되었다. 눈보라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눈을 뜨고 있기 힘들 만큼 세찬 바람과 맨살을 매섭게 때리는 추위가 함께였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펑펑 내리던 눈은 “폭설”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눈보라가 되었다.
다시 머릿속에 온통 “어떡하지”만이 채워졌다. 내 앞에 선 사람들의 행선지를 엿듣자니 나와 같은 방향이었다. 만약에 앞의 사람들의 차례가 되면 합승을 부탁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던 찰나 긴 시간 나와 함께였던 그들마저 다른 방법을 찾아 줄을 벗어났다. 이미 한 시간이 훌쩍 지났고, 이렇게 있다간 정말 공항에서 컵라면이나 먹으며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불안해졌다. 8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예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택시보다 그나마 가끔씩 들어오는 버스에 희망을 걸어야 했다. 나도 택시를 기다리는 줄을 벗어나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숙소로 가기 위해 내가 타야 하는 버스는 325번 버스였다. 다행히 그 버스는 예상 대기 시간에 전전이라고 표시되었다. 그 전전이 10분이 될지, 30분이 될지, 1시간이 될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어쨌든 버스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다행인 일이었다. 내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 제주공항의 얼음기둥이 되어가고 있는 건지 모를 정도로 아득한 시간이 더 흘렀다. 추위에 손, 발이 너무 아려서 잠시 공항 안으로 들어가 따뜻한 음료라도 사 오려고 몸을 트는 순간, 기다리고 기다리던 버스가 왔다. 정말 극적인 순간이었다. 마침내, 드디어, 끝끝내, 다행히, 나는 버스를 타고 공항을 벗어났다. 아, 이제 됐다, 하면서. 추위와, 피로와, 배고픔에 눈먼 내가 잘못 탄 버스 인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