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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씨 Oct 27. 2018

8. 할머니로 만들어버렸어

내가 다 써버린 꽃길

출산 후기를 이야기할 때 누군가 내게 가장 후회되는 점을 묻는다면, 남편을 안 부른 것을 꼽겠다.

본격 진통이 시작되어 병원에 도달할 때도 나는 남편에게 퇴근할 때까지 오지 말라는 전화를 했다. 하루라도 남편의 출산휴가를 더 아낌없이 받기 위한 몸부림이었지만, 그게 잘한 일이었을까.

덕분에 내 옆에는 나의 영자 씨가 보호자로 붙어있어야만 했다. 내가 살면서 엄마한테 한 불효가 한두 건은 아닐 테지만 개인적으로는 최고 불효였다고 본다. 개처럼 울면서 진통하는 딸을 보며 우리 엄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진통하는 딸내미에 맘 아파하면서도 영자 씨는 간호사들에게 커피며 샌드위치 따위의 간식까지 사다 바쳤다. 나는 그냥 남편을 부르고 엄마를 집에 보냈어야 했다. 자식 아파하는 모습을 보며 울음을 터트리던 영자 씨가 흐릿하게 기억이 날듯 말 듯 하다. 워낙 아팠는지라......

진통이 길어지자 나는 분만실이 싫어졌다. 끊임없이 들락날락 거리는 간호사들도 거지 같은 태동 감지기도 다 짜증이 났다. 무엇보다 간호사들에게는 간식을 사다 나르면서 여전히 공복 상태인 영자 씨가 너무 신경 쓰였다.

남편 놈들이 진통 중이 아내를 두고 밥을 먹으러 나가면 평생 들을 쌍욕을 다 듣는다지만, 이 사람은 우리 엄마가 아닌가.

나는 의사에게 진통이 길어질 것 같다면 입원실에 들어가겠노라 선언했다. 자궁문은 도통 열리지가 않았고 타이밍 좋게 입원실에 들어가 저녁식사를 받았다. 영자 씨가 그걸 제대로 드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통증이 너무 심한데 오겠다던 간호사들이 오질 않아 내 발로 다시 분만실까지 걸어갔더니, 글세 열리라는 자궁문은 안 열리고- 내진 끝에 태변이 확인되어 병원 입장 15시간 만에 응급수술로 애를 낳았다.

남편은 기적적으로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받아야 하는 순간 등장했고 덕분에 탯줄도 자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고 영자 씨는 할머니가 되었다.


내 어렸을 때 기억으로 우리 엄마는 참 꽃 같은 여자였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영자 씨는 퇴근길 아빠가 사 온 장미꽃 한 송이에 웃는 여자였고, 해지는 여름날 창가에 앉아 책을 읽는 여자였다. 없는 살림에 큰맘 먹고 배운 미싱으로 꽃무늬 쿠션 커버를 만들거나, 같은 천으로 내 원피스를 만들던 여자. 노란 프리지어를 가장 좋아해 우리 남매의 입학식 졸업식 꽃다발은 언제나 프리지어였고,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도 프리지어다.

혼전임신으로 친정의 벼락이 겁이나 아빠와 도망 나와 나를 낳았다. 내가 태어나고 나서야 맞을 각오하고 처가댁에 연락을 했다는 우리 아빠는 언제나 낄낄거리며 옛이야기를 하셨지만, 글세- 내 기억에 엄마가 크게 웃었던 기억은 없다. 어려서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부잣집 늦둥이 막내딸이 단칸방에서 변변찮은 살림 갖추고 애를 낳았으니. 그 모습을 본 내 외할머니의 심정과 부모에게 그 모습을 보인 영자 씨의 심정이 어땠을지 대충 상상은 간다. 그러니 웃는 게 아빠뿐이지. 손뼉도 맞장구를 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긴 하다만, 에라 이 아저씨야. 두 남녀는 둘째 아들을 낳고 나서야 결혼식을 올렸다. 덕분에 결혼사진 구석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천진난만하게 서 있다.


포기 안 하려 포기해버린 젊고 아름다운 당신의 계절-

세정의 꽃길이란 노래 가사다. 이 노래를 처음 듣고서 아들내미 끌어안고 내가 얼마나 울었나 모른다. 영자 씨의 계절은 지금 어느쯤에 와있을까. 장사하느냐고 굽어버린 손가락 마디마디는 옛날 내가 어려서 쥐고 있던 말랑 한 손가락과는 아예 다른 느낌이다. 내 시할머니의 손을 잡았을 때도 나는 영자 씨의 손을 떠올렸다. 평생 시장통에서 장사하며 푼돈을 벌었던 노인의 손은 살이 빠지고 주름이져 말랑말랑했지만, 그 영겁 같은 굳은 살은 지워지지 않아 그대로였다. 언젠가 나이가 들어 일을 손에 놓아도 영자 씨의 손 또한 이러할까.


한참 일이 하고 싶어 몸살이 났을 때 문득 영자 씨가 떠올랐다. 아이를 갖지 않았으면,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그녀는 무슨 일이 하고 싶었을까. 한 번도 그녀가 꿈꾸던 인생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이기 이전에 사람이라서, 우울한 바다 한가운데서 표류하던 내가 그녀를 떠올린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의 엄마는 나의 선배가 아닌가.

아쉽게도 아직 그 의문의 답은 모른다. 나는 여전히 불효 중이라, 영자 씨를 마주하면 이젠 내 엄마가 아닌 내 아들의 할머니로서 그녀를 바라보니까. 그래서 사람 대 사람의 질문은 오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물어봐야만 한다. 그래야 언젠가 당연하게 찾아올 이별의 순간에 후회의 무게를 덜 수 있을 테니까. 이건 나뿐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꼭 우리를 위해 인생의 한 계절을 포기한 존재들에게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내가 없는 인생에 당신이 가고 싶었던 꽃길은 어떤 길이었는지. 그것을 들어두는 일이 얼마나 큰 가치인지 내가 엄마가 되고서야 알았다. 그리고 미안하게도, 그 순간 나의 영자 씨는 할머니가 되어야 했다. 자식이란 진짜 끝없는 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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