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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희 Oct 31. 2021

상실 그리고



며칠 전 둘재 외삼촌이 돌아가셨다. 나에게 죽음은 여전히 낯설다. 누군가를 상실해서 오는 슬픔을 크게 느껴보지 못했다. 가까운 가족 분들 중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큰 이모와 얼마 전 돌아가신 둘째 외삼촌이 하늘나라로 가셨다. 할아버지는 내가 너무 어린 나이에 돌아가셔서 그 무게를 잘 몰랐고, 할머니는 아프시긴 하셨지만 오래 사신 편이라 슬프기도 하면서 그래도 오래 사시다 돌아가셨다는 위로들을 했던 기억이 난다. 큰 이모의 죽음은 내겐 너무 갑작스러웠지만 당시의 나는 마음 어딘가가 고장 나 있었고 큰 이모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 부분은 지금도 그러하다. 매일 만나는 얼굴들이 아니기에 큰 이모도 둘째 외삼촌도 여전히 어딘가에 살아계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 돌아가신 거구나 싶기도 하다. 큰 이모와 둘째 삼촌이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하다. 아직 그들 인생의 반도 안산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고 보면 인생이 별로 길지 않은 것 같다.


부모와 형제를 잃은 엄마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엄마와 요즘 시간을 자주 보내는데 종종 나도 더 가까운 내 가족을 보낸다고 생각하면 그 상실의 크기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엄마의 슬픔을 옆에서 지켜보며 상실을 간접 경험하는 기분이 든다.


내가 처음 강렬하게 느꼈던 상실감은 스물일곱 살 때 만났던 연인과 헤어졌던 순간이었다. 스물일곱 살 헤어짐을 당했다. 그 아이는 결국 나를 떠났는데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엇이 잘못된 것 같았다. 현실이 너무 믿기 어려웠다. 잔인한 헤어짐이었다. 살면서 큰 슬픔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스물일곱의 나에게 하루아침에 일어난 상대의 부재는 죽을 만큼 힘들었다. 하루하루를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고 매일 밤 침대에서 울다 잠이 들었다. 그렇게 울다 잠이 들고 난 다음날은 새벽 7시부터 일어나 종일 바쁘게 움직였다. 하루 종일 무언가를 하러 밖으로 나갔고 저녁이 되면 집에 돌아와 몸이 지쳐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한 달을 버텨냈다. 한 달 정도가 지나자 그럭저럭 일상생활이 가능해졌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 후의 헤어짐은 그렇게 슬프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살면서 그때 느꼈던 슬픔보다 더 큰 상실의 슬픔을 느껴본 적이 없다. 사랑하던 대상이 사라졌을 뿐인데, 그의 존재가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 지었지만 차라리 사라져 버리면 이렇게까진 방황하지 않았을 것 같은 상실의 시간이 있었다. 그 존재를 더 이상은 그리워해서는 추억해서는 안되었기에 모른 척 애쓰려고 하는 감정들이 갈 곳을 잃어 더 큰 상실로 다가왔다. 사랑하던 이를 하늘로 떠나보낸 것과 그저 만나다 헤어진 상실의 마음의 크기는 완전히 다르겠지만 헤어졌다는 건 더 이상 그 대상이 사랑의 방향성이 아니기에 그리워해서도 떠올려서도 안 되는 감정이라 생각했다. 아마 그래서 더 상실감이 컸었나 보다.


회사를 그만두고 한동안 큰 이모와 종현이가 자주 생각났다. 아직까지 인생에서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크게 슬퍼해본 경험이 없다. 그래서일까? 가장 큰 슬픔이 닥쳤던 스물일곱 살 때 느꼈던 상실감이 생각났다. 벌써 한참 전의 일이었지만 이 상실감은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다. 관계가 없던 종현이에게 관계의 접점이 생겼다. 같은 이유로 이모도 종현이도 생을 마감했기에. 매일 밤 그가 생각이 났고. 눈물이 계속해 났다. 이해가 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왜 그의 죽음에 이리도 뒤늦게 슬퍼하는 걸까? 아마도 나는 이모의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종현이를 생각하며 조금씩 이모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애도의 시간은 시작되었다. 모른 척하고 살았던 그의 부재에 대해, 이모의 부재에 대해, 우울증에 대해 정면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슬프고 이따금씩 불안하고 무섭다. 그리고 사무치도록 그립다. 왜 자꾸 떠오르고 그리워하는지 왜 이렇게도 슬픈 건지. 지금 떠올리며 보내는 시간이 애도의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아직 삼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감정이 무뎌지는 걸까 싶다가도 큰 이모의 죽음도 한참이나 뒤늦게 슬픔의 감정으로 다가왔으니 어느 날 그 슬픔이 다가올지 모른다.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나가는 일상을 잘 견뎌봐야지. 나를 많이 사랑해주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세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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