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나팍 May 07. 2023

비교하지 않는 마음은 어떻게 갖는 것인가

한국인으로 한국사회에 살면서 갖게 되는 가장 큰 특징은 '비교'하는 태도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비교문화에 노출되었다. 집에서는 옆집 애와 비교한다. 그 대표적 단어들이 '엄친아, 엄친딸'이다. 학교에서는 등수로 비교한다. 등수는 혼자서는 절대 매길 수 없는 상대평가의 대표적 표본이다. 반 등수부터 전교 석차, 전국에서 상위 몇 프로인지 순식간에 결과치가 나온다.


학교를 졸업하면 끝일까?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본격적인 비교의 수레바퀴에 갇히게 된다. '누구는 어디 취업했다'를 시작으로 '누구는 연봉이 얼마다' '누구는 벌써 결혼했다' '누구는 외제차를 산다' '누구는 집이 몇 평이다' '누구는 승진했다'를 비롯해 라이프 사이클 전반에 걸쳐 비교할 요소들이 수도 없이 생겨난다. 학생 때는 단지 성적만 가지고 비교당하지만 사회로 나오면 외모, 능력, 경제력, 지위, 집, 차, 여행 등 비교할 요소가 끝도 없다. 그리고 더 이상 부모가 비교하지 않아도 스스로 잣대를 들이대며 비교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가정을 일궈 아이를 낳으면 좀 나아질까? 전혀 그렇지 않다. 아이를 키우면 '비교'가 더욱 심화된다.

- 누구 애는 00개월에 말을 유창하게 한

- 어떤 애는 00개월에 한글을 뗐

- 누구 집 애는 영어로 대화가 된다더라

- 누구 애는 사교육비에 얼마를 쓴다더라

이런 얘기가 사방에서 들려오기 일쑤고 자신도 모르게 뉘 집애인지 모를 그 아이와 자식을 비교하게 된다. 내가 뒤처지는 것보다 더 싫은 게 자식이 뒤처지는 것이다. 본인도 모르게  아이의 발달속도를 기대하게 되고 남들보다 빠르거나 잘하지 못하면 속상해하고 불안해한다.





무언가 결단을 내릴 때

남들과 다른 길을 가려고 할 때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고 싶을 때

님들과 다른 소신으로 육아를 하고 싶을 때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감행하고 싶을 때

연어가 되어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려 할 때


이런 비교 문화와 사회적 분위기는 우리의 선택을 가로막는다. 남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선택을 하려는 걸 극도로 꺼려한다. 그래서 모두가 그저 옆집애처럼 '평범하게'만 살아주길 바란다. 남들처럼 살면 안정감을 느끼고 남들과 다르게 살려고 하면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내가 대기업을 퇴사하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다. 모두가 '대기업'을 선택하고 있는데, 역행하는 선택을 하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시선이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동료들 중에는 차마 퇴사를 선택하지 못한 채 나를 통해 위안과 대리만족을 하며 '응원'의 눈빛을 조용히 보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세상이 나를 보는 시선을 통해 느낀 점은 '행복에 대한 정의'에도 편견이 있다는 점이다.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면 행복하다'는 편견이다. 이 정의가 모든 사람에게, 모든 상황에서, 모든 나이에 똑같이 적용되는 점은 절대 아니다. 모두가 같은 상황에서 행복과 만족을 느끼는 답이 정해져 있다면, 우리가 생김새, 키, 성격, 성향, 장점, 단점, 취향이 모두 제각각으로 다르게 태어난 이유가 없지 않을까? 심지어 개인조차도 나이대와 환경에 따라 가치관이 계속 변하는데 일생의 만족도 지표를 획일화된 정답 속에 가둘 수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제 각각 다르게 생긴 것처럼, 모두가 다르게 살아도 괜찮다. 모두가 비슷한 색의 옷을 입고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갈 때, 노란색 옷을 입고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도 괜찮다. 남들처럼 살지 않아도, 남들처럼 선택하지 않아도 괜찮다. 각자의 방향과 각자의 속도로 살아도 괜찮다. 들면 조금 쉬어가도 된다. 몇 살이 되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법칙 같은 건 없다. 모두가 상대적인 비교 잣대일 뿐이다. 내가 너무 느린 걸까? 생각이 들 때 뒤집어 생각해 보라. 상대가 너무 빠른 건 아닌지 말이다. 어느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내가 대기업 퇴사를 선포했을 때, 95%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이랬다.

- 너 나가면 후회할 거야. 안정적인데 왜 나가?

- 그냥 꾹 참고 다녀. 남들은 잘만 다니는데 넌 왜 그러니?

- 다른 데 간다고 별 거 있을 것 같니? 직장생활이 다 똑같지 뭐

- 그런데 좋은 회사를 도대체 왜 퇴사하는 거야? 정말 궁금해서 그래

- 시집갈 때까지 만이라도 다니는 게 낫지 않니

- 나가서 뭐 하려고? 직장도 안 구했다며


남들과 다른 길을 가는데 모두의 불안과 걱정, 근심 어린 눈빛과 메시지를 수 없이 들어야 했다. 내 소신을 일일이 설명하기에 입이 아플 정도라 어느 순간부터는 대꾸도 줄였다. 그런데 퇴사 후 유럽여행을 가보니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유럽에서 만난 20대 초반의 친구들이 말한다


- 우리는 고등학교 졸업하면 1년 정도 유럽 여기저기 여행 다녀. 그러면서 견문도 넓히고 하고 싶은 것도 해봐

- (놀란 눈으로) 대학은 바로 안 가? 1년 이상 쉰다고? 정말이야???

- 응! 왜 꼭 가야 해? 1년 정도 실컷 세상을 구경해 보고 다녀와서 보통 가업을 잇기도 하고, 대학을 가기도 하고 그래.


이때 나의 사회적 통념이 완전히 깨졌다. 수능을 보고 스무 살이 되면 무조건 대학을 입학해야 하고, 재수를 선택하면 최대한 빨리 다시 대학을 입학하기 위해 모진 시간을 견뎌낸다. 남들이 대학 갈 때, 한 살이라도 똑같은 나이에 입학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뒤처진 느낌이 든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왜 그래야 하지?'에 대해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게? 왜 졸업 후 바로 입학하지 않고, 졸업 후 바로 취업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행동하는 거지? 너무도 당연시 생각했던 거라 여기에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구 건너편에선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개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한 가지 길이 아닌 여러 가지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제 각각 자신이 가고 싶은 방식으로 나아간다. 한국에서 만일 대학을 안 가고 여행부터 다닌다는 선택을 한다면, 얼마나 많은 눈초리를 견뎌내야 할까. 얼마나 많은 반대싸워 이겨내야 할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는 남들처럼 살지 않고,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스스로 입증해 냈다. 내게 잘 맞고 내가 원하는 일을 찾아냈다. 이를 통해 내 선택이 옳았음에 확신이 생겼다.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 내면의 소리를 따라 행동했기에 지금의 결과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타인의 기대가 아닌 내가 바라는 결정을 하며 나아갈 것이다. 일련의 과정에서 다른 일도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아효능감이 상승했다. 그래서  뿐만 아니라 육아, 가정, 재테크, 취미 등 모든 면에서 '남들보다'가 아닌 내 소신껏 내가 행복하고 만족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물론 선택만 한다고 모두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다. 그 선택을 최고로 만들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나 역시 원하는 것이 있을 때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독하게 최선의 노력을 했다. 그래서 'You deserve it.'이라고 생각한다.




비교하는 마음을 버리면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내 행복을 위한 길에 집중할 수 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변화에 용기 있게 도전할 수 있다.


내 선택을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모두가 반대를 해도 거기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99%가 A를 선택하고, 나 혼자 1%가 되어 B를 선택한다 해서 내가 미운오리새끼가 되는 건 아니다. 그저 내 자신의 신념에 따라, 내 마음의 소리에 따라, 내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따라 행동한 것뿐이다. 그저 남들보다 훨씬 더 용기 있는 선택을 한 것뿐이다. 내 인생이기에 누구도 왈가왈부할 수 없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기만 하면 된다. 그뿐이다.


이건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게 아니다.

그냥 나답게 사는 거다.

나답게 살자.


달콤한 인생을 위해
매거진의 이전글 10명을 겪은 팀원이 본 최고의 팀장, 최악의 팀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