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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Feb 05. 2024

대화창(窓)


 그와 내가 나누는 대화창은 고요한 눈밭이다. 하늘에서 함박눈이 고고하게 떨어지는 창. 그 창 안에 그와 나는 마주 서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눈발이 고백이 되어 마음에 쌓였다. 나의 마음에 그의 고백이 차곡차곡 쌓인다. 가슴에 손을 얹고 호흡을 내뱉어본다. 얼마나 심장이 뛰는지, 머리가 아찔해진다. 단지 그가 말을 하고 있을 뿐인데, 하얀 말풍선이 위로 올라갈 동안 현기증처럼 내 정신도 아득해진다.

 며칠 째 가슴이 아파서 심호흡을 내쉬고 있다. 옆자리 앉은 동료가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데, 말없이 가만히 고개만 가로저었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별 탈 없이 잘 굴러갔다. 내가 티 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걸 삼십 대 즈음 들어서야 깨닫게 된 나는, 미래를 떠올리는 게 속절없음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떠올렸다. 그와 나의 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 주변을 에워싼 사람들에 대하여, 또는 더 넓은 배경에 대하여. 상황은 풍부해졌고, 그만큼 수많은 변수가 가지를 뻗었다. 다가올 미래보다, 다가오지 않을 미래가 더 많은 상상들. 이 모든 생각들은 오직 상처받지 않기 위해 떠올렸던 것이지만, 덕분에 오늘날의 나를 더 보수적이고 원칙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러닝화 한 켤레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냥 어디든, 그냥 숨이 차게 뛰고 싶었다.

 고요한 눈밭을 떠올린다. 그 사람의 말들이 고여 마음에 쌓이고, 고요한 공간에서 내 심장소리는 더 크게 울린다. 그가 나에게 뻔한 사랑고백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와 나의 창에선 보이지 않는 그의 숨결까지 느껴졌다. 그 숨결, 그 분위기, 하얀 함박눈처럼 흘러내리는 대화들이 가슴에 녹지 않고 쌓였다. 그 축적된 대화의 무게만큼이나, 내 심장은 더욱더 묵직하게 뛰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달리기도, 뛰는 심장을 속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뛰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생각한다. 감정적인 것에서 벗어나, 조금 더 이성적으로. 내 모습이 아닌, 제삼자의 모습으로. 나는 무엇 때문에 그와의 관계에 몰입하는 걸까? 어쩌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심인 걸까, 아니면 진짜 내가 그를 사랑해서일까? 그는 나에게 진심일까?

 가슴이 터질 것같이 뛰고 나면, 목에서 숨이 터져 나오고 머리에 찌릿 전기가 통한다. 너무 힘들면 헛구역질과 함께 눈물도 나온다. 힘겹게 나를 혹사시키고 나면, 다음 달리기에서 나는 한층 더 성장해 있었다. 그런 것처럼 사랑에 대한 설렘도, 다음번엔 무뎌져있을지도 모른다. 사랑에 무뎌진다는 것, 그건 달리기의 성장만큼 값진 기분은 아닐 테다. 내가 정말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무뎌진다는 것은, 어쩌면 그와 나에게 더 좋은 의미일지도 모른다. 이 설렘에 무뎌지고 나면, 더 편한 마음으로 그를 마주할 수 있게 되리라. 더 이성적으로,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 내가 이 사람 곁에 오래 있으려면, 오히려 특별한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한다. 그저 아는 사람 정도가 되어야, 오히려 나는 그의 곁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 감정이 커져 더 큰 상처를 주기 전에, 그와의 사랑을 끝낸다. 이제 누군가와 이별하는 일이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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