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은 늘 타인의 물결을 먼저 보았다. 누군가의 어깨선에서 반사되는 미세한 떨림, 가슴팍을 타고 흘러나오는 온도의 기압, 말과 말 사이를 메우는 곡선의 잔향. 세상은 파도의 문장으로 쓰였고, 림은 그 문장을 해독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해 눈을 돌릴 때마다 문장은 공백으로 끊겼다.
─ 선생님 주변에 무슨, 물결 같은 파동이 보여요.
림은 현의 말을 떠올리며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앞에 서 있으면 유리 뒤 풍경만 선명해지고 정작 자신의 얼굴은 초점 없이 사라졌다. 타인의 윤슬을 해석하는 동안, 자신의 물결은 관측되지 않았다. 림의 눈에는 그 어디에도, 감정의 선율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상담실의 의자에 앉아 있으면 종종 공기가 층을 이루는 순간이 있었다. 누군가의 고백이 끝났을 때 들려오는 정적, 손끝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 창밖의 눈발이 유리창에 닿아 꺼지는 소리. 그런 장면마다 림은 타인의 파장을 정리했다. 슬픔은 깊은 청의 장력, 분노는 붉은 지그재그, 무관심은 무색의 얇은 비늘. 분류하고 서랍에 넣고 라벨을 붙였다. 그러나 림은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의 마음에 라벨을 붙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내 마음은 지금, 어떻지?'
한 번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타인의 곡선을 매끈하게 다듬는 일은 업이었고, 자신의 곡선을 돌보는 일은 사치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모종의 사건(K) 때문에 사람에 대한 믿음이 꺾인 뒤로, 림의 눈은 더 민감해졌다. 저 사람의 마음 상태는 어떻지? 타인의 심리를 집요하게 파낼수록, 내부의 파동은 바깥으로 드러나지 못했다. 타인의 말과 표정이 내는 불협화음은 점점 더 크게 보였다. 속으로는 질투를 품고 있으면서 겉으론 칭찬하는 얼굴, 선의라는 포장지로 욕망을 건네는 손, 죄책감을 미덕처럼 착용하는 자세. 림은 그 장면들을 너무 많이 보았다. 더는 놀라지 않게 되었을 때, 놀라지 않는 자신에게서 미세한 혐오가 피어올랐다. 타인에 대한 혐오였고, 동시에 이 혐오스러운 파동이 자신에겐 없는 것에 대한 혐오였다. 지극히 인간적인 면들이 림 자신에게는 없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날이면 상담실의 공기가 어둑해졌다. 그럴수록 림의 마음엔 조급한 의구심이 들었다.
사실 나에게도 파동이 있지만, 내 눈에만 안 보이는 거 아닐까?
파동의 색을 판독할수록, 림은 색맹이 되어가는 듯했다. 타인에겐 색을 명확히 부여하면서도, 자기에게는 어떤 색도 허락하지 않는 방식의 색맹.
현이 나타난 날, 공백은 다른 형태로 다가왔다. 어깨선에서 멈추는 빛, 소리까지 흡수하는 곡률, 흔적 하나 남기지 않으려는 공간. 림은 처음으로 판독이 불가능한 파동을 마주했다. 불편했으나, 이상하게도 림은 그 불편 앞에서 오래 멈추어 서 있었다. 타인의 파동이 없을 때 무엇으로 사람을 읽을 것인가. 호흡의 길이, 손가락 마디의 각도, 발바닥의 체열, 침묵의 길이. 몸이 남기는 증언들을 차례로 빌려 읽어보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낯선 결론이 생겼다. 파동이 없는 자리에 압력이 있었다. 살아내려는 압력. 그 압력은 색보다 근육에 가까웠다. 색이 없이도 존재하는 의지. 림은 그 사실 앞에서 천천히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숨이 가슴 안쪽의 공기를 넓혔다. 넓어지는 동안, 아주 얇은 선이 자기 몸 안에서 반짝였다. 누군가의 파동이 아니라, 자기 감각에서 출발한 빛이었다.
밤, 림은 거실 불을 끄고 누웠다. 방 안을 채우는 소리는 난방 배관을 흐르는 물소리뿐이었다. 림은 그 물소리를 들으며 문득 궁금해졌다.
나의 파동은 어떤 색깔이었을까?
림은 건물로 다시 성큼성큼 되돌아오던 현의 발자국을 떠올렸다. 그리고 앞으로 현이 마주하게 될 세상에 대한 기록들도 상상해 보았다. 발자국의 수, 신호등의 남은 시간, 시장 입구에서 만날 방울토마토의 반짝임…….
기억에 남겨진 흔적만 추적하면 끝없이 전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전진만으로는 회복되지 않는다. 멈춤이 회복을 만든다. 도망과는 다르다. 도망은 추락의 다른 말이지만, 멈춤은 쉼의 기술이다. 누군가 심해 밑까지 추락하고 있을 때, 림은 도와줄 수 없었다. 누군가 진정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사유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림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림 자신은? 과연 자신은 기억의 흔적들을 좇아본 적이 있던가.
림은 자신의 눈엔 보이지 않는 파동을 보고 싶어졌다. 림이 림의 마음을 진심으로 들여다볼 수 있으려면 어떤 장치가 필요할까. 만약 현이 다음 상담에서 림의 숙제를 마치고 돌아온다면, 림은 자기 자신에게도 같은 숙제를 내려보기로 했다. 장면에서 연결되는 수많은 기억과 추억의 조각들, 대화의 호흡과 호흡 사이의 비어 있음, 말과 말 사이의 무게, 눈과 눈 사이의 반짝이는 빛들. 그 침묵사이에 깃든 조각들을 바라보는 동안, 림은 어쩌면 자기 물결의 윤곽을 더듬을 수 있을지 모른다.
타인에게만 관대한 사람은 자신에게 잔인하다. 림은 그 둘 사이를 오래 오갔다. 자신에게 잔인한 엄격함과 타인에겐 헐렁한 관대함. 그 둘을 번갈아 입으며 살아온 시간이 길었다. 그 길이를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시작점이 보였다. 인정은 항복이 아니었다. 인정은 자신의 윤슬을 찾아갈 좌표였다. 좌표가 생기자, 길이 생겼다. 그 길은 멀지 않았다. 숨을 들이켜고 내쉬는 그 사이, 책상 모서리의 온도를 재는 그 순간, 창틀에 팔꿈치를 올리고 서 있는 그 자세. 사소한 자세들이 새로운 좌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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