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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돌

by 김희영

선생님,

저 선생님을 좋아하는 거 같아요.


*


간 밤에 림은 잠을 설쳤다. 칠흑같이 어두운, 빛줄기 하나 비치지 않는 어떤 우주를 부유하는 꿈을 꿨다. 어쩌면 심해인가? 림은 또다시, 깊은 심해 속에 마음을 뉘었다.


사람의 마음은 더 이상 색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때는 누군가의 어깨선에서 반사되는 미세한 떨림만으로도 그 곁의 물결이 가늠되었고, 말끝의 숨결 속에서 곡률이 달라지는 것을 읽어냈다.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잿빛의 공기 속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내담자가 “괜찮아요”라고 말하면, 예전엔 그 말 뒤에 달라붙어 흔들리던 파동—짙은 청의 장력이나 얇은 회색의 비늘—이 보였지만, 이제는 입술의 건조함과 눈 밑의 그림자, 목젖이 삼키는 속도 같은 것들만이 간헐적으로 그녀에게 단서를 제공했다. 림은 언젠가부터 자신이 감정의 ‘색’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의 ‘온도’를 더듬는 사람이 되어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인정은 쉬웠다. 어려운 건, 그 인정이 곧 이 일을 떠날 시간이라는 사실을 뜻한다는 점이었다.


림이 사람의 감정에 대해 궁금해했던 때는, 인간의 곁에 일렁이던 파동에 관심을 가졌던 때였다. 사람의 내면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니, 그건 림으로서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함을 심어주었다. 사람을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라고 포장했지만, 사실 어쩌면 림 자신을 능력에 취해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현의 말대로, 림의 능력이 꼭 좋았던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림도 내담자를 만날 때, 내담자가 자신에게 불쾌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미리 알아차리는 경우도 있었다. 거기에 의연하게 대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표정은 웃고 있으나, 속에서는 불쾌감이 치밀어 오르는 모습을 볼 때마다, 림은 자신의 직업에 대해 떠올렸다.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이 또한 견뎌야 한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런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무뎌질 줄 알았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K의 등장과 현의 고백. 림의 마음속의 바다는 뒤틀리고 요동치기 시작했다.


림은, 수년을 상담자로 일하면서, 학창 시절 K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선한 것보다, 자신의 이기심만을 채우는 악함이 존재한다는 걸. 그리고 이끌리듯 끌려가는 현에 대한 감정. 상담자가 내담자를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걸, 림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의 감정에 대한 정답을 갈망하는 마음이 림 안에서 끓어올랐기 때문일까? 이 마음은 현을 사랑하는 감정인가, 아니면 단순히 정답에 목말라있는 자신을 시험하기 위한 순간일 뿐인가.


오전 마지막 상담이 끝났을 때, 복도 끝의 유리문을 통해 희끄무레한 빛이 흘렀다. 제설제의 얼룩이 창틀에 얇게 말라붙어 하얗게 반짝였고, 대기실의 가죽 소파 위로 누군가 남긴 목도리의 섬유가 겨울 공기를 붙잡아 두듯 정지해 있었다. 림은 노트를 덮고 펜을 가지런히 놓았다. 종이의 결이 엄지의 지문을 훑고 지나가며 바싹 소리를 냈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늘 점심때 직원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초청 세미나가 열렸다. 테이블 위에는 샌드위치와 커피가 놓여 있었다. K는 이미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검은 터틀넥 위로 재킷을 걸치고, 손톱의 큐티클이 보이지 않을 만큼 가지런했다. 회의실의 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복도의 빛이 K의 옆얼굴을 지나가며 동전처럼 차갑게 반사되었다. 바퀴 달린 화이트보드가 벽에 기대어 있었고, 천장형 히터가 미세하게 윙— 하고 돌아갔다 멈췄다를 반복했다. 누군가는 종이포크를 점심 샐러드에 꽂았고, 누군가는 플라스틱 뚜껑을 벗기며 수프의 김을 식혔다.


초청 연사는 인근 병원의 신경정신과 전문의였다. 현장에서 오래 케이스를 본 사람답게 과장된 수사는 없었다. 대신 슬라이드에는 표와 간단한 도식, 그리고 몇 개의 ‘시사점’이 붙어 있었다. 제목은 건조했다.


<애착·질투·통제: 사랑의 임상적 작동>


그는 사랑을 ‘낭만’이라는 단어로 설명하지 않았다.


“환자들이 ‘영원한 사랑’을 말할 때, 그건 흔히 ‘영원히 보상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의 말입니다. 기대가 금단으로 바뀌면 통제와 질투가 적정 수위를 넘죠. 여기서부터는 감정학이 아니라 위험관리의 언어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는 표를 나란히 띄웠다. 한쪽에는 ‘상호성/이타성/양보’라는 단어들이, 다른 한쪽에는 ‘통제/감시/보상’이라는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


“임상에서 보면, 앞의 표는 대체로 뒤의 표의 결과로 귀결됩니다. 사랑은 아름다움의 표상으로 시작해 자기 보존의 장치로 작동합니다. 치료적 관점에서는 그렇게 이해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림은 커피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종이컵이 손바닥의 열을 얇게 환류시켰다. 옆자리엔 K가 앉아 있었다. K는 언제나처럼 정돈된 자세로, 슬라이드가 바뀔 때마다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 시간이 돌아왔을 때, K가 손을 들었다.


“결국 임상에서 사랑은 ‘자기 보존적’이란 말씀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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