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밀물과 썰물

by 김희영

겨울 아침의 공기는 유리 파편처럼 서늘했다. 온 도시가 소금처럼 고운 눈가루를 뒤집어쓴 채 침묵을 약속하고, 건물들의 가장자리에는 밤새 내린 눈이 낮은 사구처럼 쌓여 있었다. 창틀의 쌓인 눈은 세상 밖의 소음을 빨아들였고, 전봇대의 검은 선은 하늘빛 속으로 얇게 잠겨 있었다. 도시가 느리게 호흡했다. 눈발은 수면 위로 솟았다가 가라앉는 심해의 숨방울처럼, 흩어졌다가 모였다.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사이로, 각자의 체온이 조용히 움직였고, 그 위로 희고 미세한 결이 날렸다.

현은 집 문을 나서며 목도리를 턱까지 끌어올렸다. 장갑 속 손가락은 얼음처럼 둔했고, 발바닥만은 장화 속에서 뜨겁게 살아 있었다. 그는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발자국의 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숫자는 마치 줄을 그어 주는 자처럼, 걷는 길에 작은 눈금을 만들었다. 때로 숫자가 꼬여 엉키면, 그는 한숨과 함께 다시 셈을 고쳤다. 셈은 되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작은 허락처럼 느껴졌다. 허리 높이로 깎아낸 눈둑 너머로 마트의 푸른 간판이 작게 보였다. 그곳까지의 거리와 자신이 오늘 견딜 수 있는 거리 사이를 어림잡아 비교해 본 뒤, 그는 ‘괜찮아’라고 마음속에서 작게 말했다. 말은 손난로만큼의 온기를 가졌다. 바로 그 온기로, 어젯밤 내내 돌던 목소리의 그림자를 잠시 누를 수 있었다. 살인마. 한 단어가 뒤꿈치를 잡아당기는 순간마다, 더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현은 발밑의 눈을 보았다. 눈 결정이 마치 정교한 글자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글자는 두려움과 용기 사이에서 너울진 기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는 발끝으로 '두려움'을 살짝 밀어 보았다. 미끄러질 듯 말 듯, 발의 균형이 기우뚱 기울었다가, 다시 중심으로 돌아왔다. 밀물과 썰물의 작은 예행연습 같았다. 당겨지면 밀려나고, 밀려나면 다시 당겨지는 운동. 그는 오늘 마트까지 가지 못해도 괜찮다고, 도로 위의 난간처럼 마음속에 안전장치를 걸어 놓았다. 실패를 계획의 일부로 포함시키는 법을, 그는 이제 겨우 배우기 시작했다.


주말에 림은 일부러 집을 나와 먼 길을 택했다. 눈이 많이 쌓인 골목은 발목에 부드럽게 걸려 걸음을 느리게 만들었다. 느린 걸음은 생각의 결을 고르게 편다. 림은 익숙한 습관처럼 사람들 곁의 물결을 훑어보려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선생님 주변에 무슨, 물결 같은 파동이 보여요. 현의 말이 창끝 얼음꽃처럼 문득 떠올랐다. 타인의 파동을 읽는 솜씨로 살아온 시간 동안,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읽기’가 허락된 적이 없었다. 림은 오늘 그 읽기를 시도해 보고 싶었다. 파동이 아니라, 숨의 길이, 발뒤꿈치의 무게, 손목의 맥박 같은 것으로.


도로의 신호등은 느리게 시간을 엮었다. 파란불이 켜지면 몇 사람이 고만고만한 보폭으로 건넜고, 빨간불이면 다 함께 정지했다. 정지의 순간, 세계는 얇은 투명막을 낀 듯 일렁임을 멈췄다. 그때 림은 길 너머로 걸어오는 어느 한 사람의 기척을 보았다. 검은 뿔테 안경, 눈송이의 이슬을 얹은 속눈썹, 목도리 사이로 길게 흘러나오는 하얀 숨. 움직임은 조심스럽고, 멈춤은 오히려 단단했다. 그 단단함이 낯설지 않았다. 상담실의 공기가 잠깐 꺼지던 그 순간처럼, 소리가 모여들어 소거되는, 공백의 곡률. 림은 자신도 모르게 발을 반걸음 멈추었다.

횡단보도 건너편의 저 남자, 현이었다.

현 역시 림을 알아보았다. 그녀의 실루엣이 눈발 사이에서 만들어 내는 윤곽, 걷다가 멈출 때 귓불에 닿았다 스치는 머리카락의 기류, 코트 자락이 바람에 미세하게 접히는 각도.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나의 합성된 감각으로 받아들였다. 시야는 여전히 깊은 안개처럼 흐려져 있었지만, 흐림 속에서도 또렷함은 만들어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어떤 날의 설렘은 눈앞의 초점이 아니라, 등줄기를 지나 손끝으로 돌아오는 체온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신호가 바뀌고, 둘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서로를 향해 반걸음씩 다가왔다가, 각각의 간격을 존중하듯 거리를 두고 물러섰다. 현은 핸드폰을 들고 무언가를 적는 듯 보였다. 흔들리는 눈빛, 찬바람에 붉어진 두 귀, 현은 어리숙한 얼굴로 림을 힐끔 쳐다보았다. 림은 현에게 살짝 목 인사를 했다. 현도 림을 따라 가벼운 인사를 했다. 푸른 신호가 깜박이고, 무언가 말을 해볼 새도 없이 그렇게 림과 현은 스치듯 서로를 지나쳤다. 횡단보도를 건넌 후, 림은 몸을 돌려 현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현은 핸드폰을 보며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느린 발걸음, 축 처진 어깨. 현이 나아가는 방향은, 저번 상담 때 림에게 이야기했던 그 마트가 있던 방향이었다. 림은 현을 부르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 이내 다물었다. 다시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갔다.


길가의 낡은 담벼락 위로 참새들이 떼 지어 내려앉았다. 발자국처럼 찍힌 작은 발 자국 사이로, 부리에 묻은 눈가루가 반짝였다. 사람들은 보통 겨울에는 집 밖에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림은 사계절 중 겨울을 가장 좋아했다. 사람 곁에 머무는 파동이 가장 잔잔한 계절, 길을 걸어가면 퍼지는 이들의 마음이 가장 안정적인 계절. 우산이나 후드를 쓴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인생 곁으로 들어가, 걸음을 걷는 내내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곤 했다.

림은 눈이 쌓인 산책로를 걸었다. 누군가 부지런히 걸어 나간 발자국을 따라, 림도 천천히 생각에 잠겨 들었다. 지난밤, 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던 림은, 횡단보도에서 마주쳤던 현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한 번도 자신은 어떤 색깔의 파동으로 빛이 나고 있었는지, 생각해 본 적 없던 림이었다. 그 생각은 곧 림의 인생의 전반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다.

내가 정말 원하던 것이 이런 삶이었나?

인간을 혐오하는 마음으로, 림은 모든 삶을 이끌어 왔다.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림은, 자기 자신은 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자기 자신도 알아본 적 없는, 림 자신의 안에 울려 퍼지던 파동을 그가 보았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본 적 없던 현이.


골목 입구의 빵집에서는 갓 구운 식빵의 고소한 냄새가 찬 공기 속으로 길게 흘렀다. 낡은 원목 간판이 걸려있는 동네에선 오래된 빵집이었다. 주말 이른 아침이면 이 골목엔 구수한 빵 냄새가 퍼지곤 했다.

문고리에 빨간 리본에 달린 방울이 짤랑 흔들렸다.


"어서 오세요."


빵가게 주인 할머니가 갓 구운 빵을 정리하며 말했다. 림은 앙금이 하나도 들지 않은 소보로 하나와 라테 하나를 시키고 테이블에 앉았다. 빵을 판매하는 매대가 매장을 거의 대부분 차지했고, 취식 테이블은 두어 개 정도 창가 앞에 놓여 있었다. 림은 테이블에 앉으며 입고 온 코트를 정리해 맞은편 의자에 걸었다. 칭칭 감고 온 목도리도 정리해 무릎에 올려두고는, 의자에 다소곳이 앉았다. 산책을 시작할 때는 내리지 않던 눈이, 빵집에 자리 잡고 앉자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익숙한 모습의 남자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검은 뿔테안경, 검은 목도리, 기가 죽어 어리숙한 모습으로 걷는 사람. 현이었다. 림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현에게 향해 있었다. 현은 불안한 듯 핸드폰을 쥐고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채팅을 하는 것인지, 메모를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콧대를 따라 미끄러지는 안경을 검지로 잡아 올리며, 입김으로 하얗게 찬 안경을 손등까지 내려온 스웨터로 무심하게 슥슥 닦았다. 림은 그 모습을 넋 나간 사람처럼 빤히 쳐다보았다.


"밖에 뭐가 있어요?"


림 옆으로 주인 할머니가 빵과 라테를 들고 서 있었다. 림은 놀라 시선을 거두며 빵과 라테가 든 쟁반을 받아 들었다.


"아, 아뇨. 그냥 좀 아는 사람이에요."


림은 주인 할머니에게 생긋 웃으며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현이 림 쪽으로 몸을 돌리는 듯 보여, 림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주인 할머니가 림에게 물었다.


"아는 사람이라면서요?"

"네?"


주인할머니는 무심하게 한 마디 내뱉으며 자리를 비켰다.


"아는 사람인데 아는 체도 안 해요? 밖에 있은지 한참 된 것 같은데……."


그때야 림은 현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횡단보도를 지나치며 보였던 현의 붉어진 귓바퀴, 입김으로 새하얗게 서린 안경, 어딘가 기운 없는 발걸음. 주인할머니 말대로 현은 한참 밖에 있었던 사람 같았다. 림이 현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순간, 갑자기 현이 빵가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림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빵을 손으로 뜯어 입에 넣었다.


봤나?


림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때, 가게 문이 짤랑, 소리를 내며 열렸다. 림의 등 뒤로 성큼성큼 누군가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요.


"저기, 선생님."


림을 부르는 소리에, 림이 고개를 위로 올렸다. 추위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현이 서 있었다. 창밖에선 두려움이 내비쳐 있던 현의 얼굴에 아이 같은 미소가 번졌다.


"다시 돌아와도 된다고 해서요."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김희영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공감을 읽고, 마음을 씁니다.

1,940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총 22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05화림(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