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여전히 도시의 숨을 느리게 만들었다. 눈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내려오고 멎었고, 그 사이사이로 사람들의 체온이 낮게 이동했다. 빵집에서 함께 나온 그날 이후, 림과 현은 약속처럼 특정한 시간대를 공유하게 되었다. 동네의 작은 하천을 따라 난 산책로, 공원의 오래된 벤치, 붉은 벽돌 건물의 그늘. 언어 대신 리듬으로 짜인 만남들이었다. 림은 말을 아꼈고, 현은 말이 없어도 되는 쪽으로 숨을 정리했다. 둘은 나란히 걷는 동안 서로의 그림자 길이를 눈으로 재보았고, 그림자는 때로 겹치고 때로 멀어졌다. 그 간격이야말로 서로를 해치지 않으려는 방식의 사랑처럼 보였다.
림은 현에게 과제를 조금씩 늘려 주었다. 문턱 너머로 나가는 횟수를 기록하던 메모장에는 이제 지도의 작은 부분들이 붙었다. 집 근처 편의점, 중고서점, 작은 약국, 동네의 오래된 사진관, 동네 하천에 놓인 다리. 림은 현이 갈 장소를 미리 알 수 있었고, 돌아오는 주말이 기다려졌다. 뭉근한 기다림은 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림이 현에게 내어준 숙제가, 어느 날부턴가 두 사람만의 약속이 되었다.
중고 서점에서의 두 사람은 멀찌감치 떨어져 서로 마주 앉아 있었다. 히터의 낮은 송풍 소리 위로, 책장을 넘기는 얇은 마찰음이 들렸다. 현은 책을 펼친 채, 몇 쪽을 넘기지도 못하고 있었다. 대신 손가락으로 페이지 가장자리를 만졌다. 만지는 동안 그는 안정되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앉아 시집을 읽고 있는 림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현은 빠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느꼈다. 림은 그런 현의 손가락을 보았다. 살짝 말라서 굴곡이 뚜렷한 관절, 종이에 닿을 때만 아주 조금 분홍으로 차오르는 혈색. 그 변화는 파동보다 더 정확했다. 그와 동시에 림의 뺨도 살짝 붉어졌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서로의 일상 사이에 미세한 통로들이 생겼다. 현은 종종 짧은 문장을 림에게 문자 메시지로 보냈다.
─ 오늘 14:10, 서점 안까지. 환청은 들리지 않았고, 책을 읽는 내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온몸 구석구석 뜨거운 혈액이 도는 느낌이었고, 손끝이 잔잔하게 떨렸다.
그것은 림에겐 마치 형태 없는 감정, 무언의 고백처럼 느껴졌다. 림은 감정을 착각하지 않기 위해 더 신중해졌다. 저 긴장감은 단순히 낯선 곳에서 오는 감정일 뿐이라고. 지나치게 밀지 않고, 덜어낼 수 있을 만큼만 덜어냈다. 조수처럼 밀고 나가되, 저절로 물러날 시간을 남겨 두는 방식.
이제 현에게 장소에 대한 기록은, 점점 더 짙은 마음으로 남았다. 숙제를 내준 장소에서 림과 마주칠 때마다 옆에는 짧은 문장이 더해졌다.
─ 편의점 문 손잡이, 맞닿은 따뜻한 손끝.
─ 서점 3열 2칸, 책을 펴는 종이의 소리.
─ 사진관 앞 고양이, 회색과 흰색. 봄햇살 같이 포근한 누군가의 미소
림은 그 글씨들을 오래 바라보았다. 살아 있는 글씨를 바라보면, 림의 가슴 안쪽으로 얇은 빛이 한 줄 들어왔다. 그 줄기는 겨울 새벽의 물안개처럼 가늘었으나 포근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자주 침묵으로 채워졌다. 침묵 속에는 생각보다 많은 문장이 들어 있었고, 그 문장들은 서로의 몸에서 천천히 해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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