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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광(殘光)들

by 김희영

오직 어둠만이 빛을 흡수할 수 있지.

하지만 어둠이 빛을 삼킨다는 건 '파괴'가 아니라, '수용'이야.

빛은 어둠이 있음으로써 자신을 증명하고,

어둠은 빛을 품음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얻지.

이건 뺏고 뺏기는 싸움이 아니라, 공생의 관계야.


*


겨울은 여전히 도시의 호흡을 낮추고 있었다. 눈은 낮 동안에도 몇 번씩 들고났다가 멎었고, 그 틈마다 사람들의 체온이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림과 현의 만남도 그 리듬을 닮아 조용히 이어졌다. 산책로의 난간, 도서관 옆 벤치, 사진관 앞 고양이가 웅크린 지붕 밑 그늘. 여전히 침묵은 이어져 거리를 두는 듯했지만, 두 사람의 손끝은 서서히 가까워져 갔다. 온기는 손끝에서 손마디로, 손마디에서 손등으로 이어졌다. 현의 뜨거운 손이 림의 손등을 그러쥘 때마다, 림은 터질 것 같은 심장박동 소리를 느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흥분된 뜨거운 피의 흐름을. 림은 그럴 때마다 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인간을 혐오하던 림이었지만, 림은 현과 자신에 대한 감정이 진심이길 바랐다. 현에게선 여전히 파동이 없었다. 그러나 현의 뜨거운 손이 현재의 감정을 증명하리라 믿었다.


소박한 일상들은 반복되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이제 림의 인생에도, 현의 인생에도 서로는 아주 또렷한 기억의 한 조각이 되었다. 말로써 내뱉어 약속하지 않았지만, 둘은 이제 느낌으로 알았다. 주말 오후 2시,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은 횡단보도 앞에서 만났다. 현은 이제 림을 위해 핫팩을 데웠고, 림은 현을 위해 작은 종이봉투를 준비했다. 현이 보내는 기록용 문자 메시지는, 지난 시간 곁으로 두 사람을 끌어가는 타임캡슐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담실에서 작은 이상이 생겼다. 오전 첫 상담이 막 끝났을 때였다. 내담자는 매무새를 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림은 늘 하던 대로 노트를 덮으며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으레라면 내담자 곁에서 흐르는 얇은 무늬의 물결, 말의 마지막 자락에서 생기는 색의 기류가 함께 사라져야 했다. 그런데 그날은, 내담자의 파동이 애초부터 흐릿했다. 처음엔 내담자의 감정이 닳아 빠진 날이라 여겼다. 그러나 점심시간의 카운터 직원에게서도, 복도 끝 화분 옆에 앉아 있던 남학생에게서도, 림이 보아 오던 명확한 굴절과 색깔은 나타나지 않았다. 목탄 소묘처럼 윤곽만 남았다 사라졌다.


파동이 희미해져 잘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피곤해서인가? 림은 고개를 조금 숙이고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평소처럼 조용했다. 귀밑머리가 목폴라 위로 얌전히 내려와 있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 같지 않은 얼굴이, 그날따라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림, 요즘 무슨 일이 있어?"


카운터에 서 있던 직원이 림에게 물었다.

림은 상담소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읽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누군가 거짓말을 하면 귀신같이 알아챘다. 그것은 내담자뿐만이 아니었다. 카운터 직원을 비롯해, 내담자가 아닌 이 건물의 모든 사람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듯했다. 그런 림이 이제는 사람의 얼굴과 표정만으로 마음을 파악해야만 했다. 누구보다도 진심을 간파해 낼 수 있었던 림이, 정말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달라져버렸으니, 카운터 직원도 림의 건강을 염려했다. 하지만 림은 자신이 인간의 곁에 뿜어져 나오는 파동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할뿐더러, 그걸 뒤늦게 설명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냥 좀, 피곤한 것 같아요."


림은 코트를 여미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림의 목도리가 바람을 받아 뒤로 살짝 젖혀졌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내쉬는 동안, 마음 한가운데에서 물결 한 줄이 일어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물결은 소리를 내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했다. 아니다, 정말 존재하긴 한 것일까? 이제 그녀는 물결에 대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감정에 대한 모든 것들이 의문스러웠다. 그동안은 확인도, 부정도 아닌, 수용으로 그 물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감정의 파동이 늘 답을 주지는 않았다. 때로 진심의 방향만을 알려 주었다. 그 방향을 따라 한 발, 또 한 발, 림은 타인의 파동을 분석하는 데에 온 삶을 쏟아왔다.


눈이 천천히 낮아졌다. 낮의 시간은 얇아지고, 밤은 물살처럼 길어졌다. 눈발은 이틀에 한 번씩 도시에 와서 소음을 덮었다. 그 사이를 걸어 다니던 림은 어느새 사람들의 어깨에서 흘러나오는 물결을 더 희미해졌다. 희미해졌다는 말은, 그 자체로 불안과 안도를 한 묶음으로 들고 있다는 뜻이었다. 안도는 조용히 다가왔다. 파동이 덜 보이면, 이 지긋지긋한 인간에 대한 미움을 덜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불안도 따라왔다. 파동이 덜 보이면, 자신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


상담실 창문에 붙은 얇은 성에가 점심 빛을 받아 희미하게 풀렸다. 히터의 송풍이 낮게 깔리고, 시계 초침이 벽을 따라 둥근 원을 긋는다. 림은 노트를 펴고 펜을 쥐었다. 현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문에 매단 작은 방울이 짤랑, 울렸다가 곧 조용해졌다.


"왔어요?"


림의 물음에 현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은 예전보다 움직임이 덜 조심스러웠다. 의자에 앉아 코트를 벗고, 목도리를 차분히 감았다 푼 뒤 무릎 위로 접어 올린다. 그 사이 림의 시선은 그의 안경으로 갔다. 함박눈처럼 두껍던 안경알이 눈에 띄게 얇아졌다. 옆에서 보면 거의 평면 같았다. 고개를 기울이면 얇은 유리의 단면이 겨우 반짝였다.


"2월이 다 가는데도, 눈은 멈출 생각이 없네요."


현이 천천히 숨을 골랐다. 말없이 방 안을 둘러보고, 벽의 시계를 본다. 숫자를 더듬지 않는다. 초침의 회전을 따라가는 눈동자가 부드럽다. 눈이 시계에서 림의 손으로, 손에서 노트의 여백으로, 다시 창문 가장자리의 성에로 옮겨간다. 움직임이 끊어지지 않는다.

림은 시작을 알리는 짧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을 묻는 의식 같은 인사였다. 현은 어깨를 낮게 내리고 고개를 조금 숙였다. 며칠 전보다 더 가까운 미소가 입가에 잠깐 스쳤다.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이제 낯선 소리들도 안 들리죠?"


"네, 아직까지는요. 선생님 덕분에 바깥도 무사히 잘 나오게 됐어요. 감사합니다."


생긋 웃는 현의 얼굴을 보며, 림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시력도, 많이 좋아진 모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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