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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波浪)

by 김희영

비는 오후 내내 그치지 않았다. 유리창 위로 길게 흘러내린 빗줄기들이 서로의 자취를 삼키며 한 줄의 선으로 합쳐졌다. 림은 상담 일지를 마감하고 의자에 기대었다. 오늘 마지막 내담자가 나간 지 한 시간쯤 됐지만, 방 안은 여전히 사람의 숨결로 묵직했다. 형광등이 낮게 웅웅 거리며 잔음을 냈다.

그때, 복도 끝에서 누군가의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이지만 낯선 리듬이었다. 림은 펜을 내려놓았다. 문이 가볍게 두드려지더니, 누군가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었다.


“안녕, 림?”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시간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잠시 숨을 삼켰다.


“……K?”


“오랜만이네.”


K가 문가에서 웃었다. 검은 트렌치코트의 어깨는 젖어 있었고, 젖은 머리카락에서 빗물이 흘러내렸다. 손에는 작은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림은 얼어붙은 채 K를 바라보았다.


“여긴 어떻게—”

“같은 층에 새로 생긴 심리연구실 알지? 이번에 거기 배정받았어.”


K가 말을 자르며 말했다. 림은 단번에 표정을 다듬었다. 놀라움이 불쾌로 번졌지만, 표면은 잔잔했다.


“그래… 몰랐네.”


“아직 공지가 안 나갔을 거야.”


K는 웃으며 한 발 들어왔다.


“오늘 첫 출근이었는데, 퇴근 전에 인사라도 하러 오고 싶더라고. '여전히' 상담하나 싶어서.”


K는 '여전히'라는 말을 내뱉으며 풋, 웃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던 림을 놀리는 듯한 말투였다. 림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자리도 좁고 바쁠 텐데 일부러 왔네.”


림은 의자에 등을 붙인 채 말했다.


“그냥 반가워서.”


K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네 공간답다. 질서 있고, 어딘가 모르게 융통성 없는 것 같고. 딱, 너 같아.”


K의 말에 림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K의 시선이 방 안을 천천히 훑었다. 가습기 위의 초록빛 조명, 깔끔하게 정리된 상담 일지, 벽에 붙은 ‘경청의 기술’ 포스터. 모든 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그 정돈이 림에게는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요즘 어떻게 지냈어?”


K가 물었다.


“그냥, 일하고 살지.”


림의 목소리는 최대한 평온했다. K의 등장은 예상 밖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고등학교 졸업 전, J를 죽였냐고 다그치던 학교 복도 장면이 순간적으로 스쳤다. 그날 이후로 연락을 끊었고, 이름조차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같은 건물에서 일하게 되다니. 운명이라는 말이 가장 잔혹하게 쓰일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때 이후로 많이 변했지.”


K가 이어서 말했다.


“나도 이 일 하게 될 줄은 몰랐어.”


K는 의자에 앉은 림을 내려다보며, 익숙한 듯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림은 생각했다. 이 '사이코패스'가 졸업 때 어디 학과로 간다고 했더라? 내가 철학과를 택할 때, K도 비슷한 곳을 택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사람 마음에 대해 알고 싶었거든. 그때의 나를 이해하려면 결국, 이 길로 올 수밖에 없더라.”


"널, 이해하려면?"


"그래, 그때 내가 왜 J에 대해 그런 '희열감'을 느꼈는지 말이야."


림은 시선을 책상 위로 내렸다. 펜이 굴러 떨어지려다 멈췄다. “그래.”라고 림은 짧게 대답했다. 그 한마디에 모든 감정이 들어 있었다. 놀라움, 경계, 그리고 알 수 없는 피로.


“근데 넌 여전하네. 그 눈빛. 사람을 꿰뚫는 듯한, 예전 그대로야.”

“직업이니까.”


림은 건조하게 말했다. 그녀는 최대한 표정을 지워냈다. 상담사로서의 훈련된 중립성으로. 그러나 그 안쪽에서는 어지러운 해일이 일고 있었다. K의 목소리, 표정, 그 특유의 말끝의 흐름까지. 모든 게 기억 속의 그림자와 겹쳐졌다.


“이제 상담사 보조로 일한다고 했지? 앞으로 할 게 많겠네.”


“응. 이번 달부터 하긴 하는데, 환자 면담은 아니고, 기록 정리나 사례 연구 위주야. 할 거 많아도 너랑 이야기할 시간은 있지."


K는 가볍게 웃었다.


“같은 공간에서 일하게 됐다니 묘하지 않아?”


림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 뒤에는 얇은 유리막 같은 거리감이 깔려 있었다. 그러자 K가 손을 거칠게 흔들며 웃었다.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 마! 그날 이후로 나도 많이 생각했단 말이야.”


웃으며 큰소리로 말하던 K가 목소리를 고쳐 조용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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