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게리 존슨의 삶을 비료 삼아 만들어지긴 했으나, 링클레이터가 존슨이 활동하던 당시의 시공간대에선 벗어나고자 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극 중 인물들은 스마트폰을 이용하고, 페이스북에서 상대방의 정보를 탐색한다. 그렇다면 링클레이터는 어째서 실화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끌어왔는데도, 게리 존슨이 실제로 활약하던 80~90년대의 시공간을 그대로 재현하고 고증하는 데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걸까.
잠시 스크린을 벗어나 실제 게리 존슨의 삶을 들여다보자. 루이지애나주에서 자랐던 게리 존슨은 베트남전에 참전해 군 감독 헌병으로 복무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루이지애나에서 보안관 대리로 일하다 1970년대 중반부터 텍사스주 포트 아서 경찰서로 옮겨 마약 중독 관련 잠복 작업에 동원됐다. 존슨은 80년대 후반부터 300건이 넘는 고용 살인 혐의를 조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수사관으로 일하는 동안 60건이 넘는 체포 기록을 남겼다. 90년대에 들어서자, 지역 언론들도 연이어 ‘완벽한 가짜 암살자’ 존슨의 이중생활을 조명하는 등 그의 행보는 여기저기서 화제를 모았다.
이런 그의 사연이 링클레이터의 레이더에 걸려든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관심사는 언제나 사람 그 자체가 아니었나. <멍하고 혼돈스러운>, <비포> 시리즈, <버니>, <보이후드>, <어디갔어, 버나뎃> 등 그의 필모그래피를 수놓는 작품들을 떠올려 보자. 링클레이터는 사람이 살아가는 존재 양식과 삶을 추동하는 요소들을 자신의 카메라와 스크린에 녹여내는 데 평생을 할애해 왔다. 일상에서 피어나는 비일상의 순간들, 비일상처럼 보이는 일상의 면면들. 이런 장면들이 게리 존슨의 삶에 대한 정보를 접한 링클레이터의 머릿속엔 자연스레 재생됐을 테다. 그렇기에 링클레이터는 그의 삶을 늘어놓는 작업보다도 그라는 존재 자체를 풀어내길 원한 것처럼 보인다. 사람을 말하는 데 있어 중요한 건 그 사람에 대해 매달리는 일이지, 시공간 배경을 정확히 따져보는 일이 아니지 않나.
(중략)
수많은 레퍼런스를 통해 대중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히트맨’의 이미지를 존슨이 왜 빌려왔고, 또 영화가 굳이 왜 늘어놓았는가. 킬러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의 여부보다도, 킬러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선택하는 우리들의 몫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링클레이터가 이 장면을 왜 삽입했는지 따져보는 것보다 이를 수용하는 관객들이 각자의 기준과 관점에서 자신만의 사례 보관소를 들여다보는 일이 더 가치가 있는 셈이다. 그래야만 환상을 연기하는 게리 존슨의 사례를 경유한 뒤 스크린에 맺힌 현실과의 접점을 거쳐 우리네 삶으로 도달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결국 몽타주 시퀀스가 배치된 이유보다 우선순위에 와야 하는 요소는 우리가 이 구간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우리는 앞서 <보이후드>가 왜 만들어져야만 했는지 당위를 따지는 일에 몰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작품 속에서 드문드문 피어나는 일상의 순간들을 자연스레 우리네 현실과 연동시키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점에서 보면 <히트맨>은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필모그래피를 수놓는 영화들과 궤를 같이한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어도, 장막을 한 꺼풀 걷어내면 그의 영화가 지금껏 우리에게 스며들던 작법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청부살인업자의 서사는 그저 외피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