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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ah Nov 03. 2020

#34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

아메리카노와 김치볶음밥

지금 당신에게 단 하루의 휴일이 주어진다면. 그래서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그럼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게 될까.

많은 사람들이 휴양을 위해 떠나오는 호주 골드코스트에서 그 누구보다도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자면,

이 또한 누군가 간절히 바라는 하루하루일 수 있다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그럴수록 다짐한다.


마음껏 쉬어. 니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방식대로.


친한 친구의 부모님이 선물해주신 반지. 늘 지니고 다니는 것.


그래서 아침이 되면 나는 어김없이 바닷가로 향한다. 

트램을 타고 쉽게 쉽게 가는 날도 있고, 해안가를 따라 오래오래 걸어서 가는 날도 있고. 

해안선은 결국 하나로 이어지는데 어쩜 이렇게 구간마다 파도도 다르고 모양새도 다른지. 

그 해변가의 특성에 따라 바다가 서로 다른 유형의 사람들을 끌어오는 게 신기하다.

어느 구간으로 가면 서핑보드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잔뜩 몰려있고, 또 다른 구간으로 가면 어린아이들 데려온 부모님들이 아이를 어깨에 얹어 바다를 구경시켜주고 있고. 어딘가에선 거의 벗은 사람들이 잔뜩 모여 선탠을 하고 있다. 

나는 어느 쪽이든 항상 평화롭고 행복한 느낌을 주는 모래사장 위에서 멈춘다.

카페 no name lane.


오늘은 작정하고 모래 위에 누워있으려고 집에서 책 한 권이랑 요가매트까지 챙겨 나왔는데, 

정신 차려 보니까 요가매트 위에서 책을 읽다 잠들어 있었고 바람이 많이 불어서 내 온몸 위로 모래가 시즈닝처럼 뿌려져 있었다.

책 페이지 사이사이마다 부지런히도 들어가 있는 모래를 열심히 털고 또 털다가 지쳐서 근처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테이크아웃도 편하게 할 수 있게 카운터가 한 군데 더 있다.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커피를 마셨는데, 그때 사람들은 대체 왜 돈을 주고 담뱃재 태운 물 같은 걸 먹는 건가 진심으로 궁금했었다. 


아직도 생각난다.

'이게 맛있어? 이게 맛있다구?'

'응 맛있어. 마시다 보면 이것만 마시게 돼.'

그때 내 눈에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주문하는 사람들은 전부 사연 있는 어른처럼 보였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냥 살려고 마시는 거였다. 

그 당시 나는 그마저도 달게 마시고 싶어서 초콜릿이 들어간 모카커피를 마셨는데 이제는 거꾸로 엄청 달달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니 사람은 정말 변하고 또 변하는 가보다.

우리나라 말로 따지면 카페 '이름 없는 길' 정도?


이제는 나도 드디어 제 발로 아메리카노를 하루에 몇 잔이나 마시는 어른이 됐는데 역시나 내 위는 참아주지 않았고 빈 속에 커피를 넣으면 타는 듯한 쪼임을 느끼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제 커피는 하루에 한 잔, 진짜 마시고 싶을 때만, 그것도 두유랑 섞어서 마신다. 하루에 한 잔이라는 제한을 두기 시작하니까 종일 커피 마시는 순간이 너무나 기다려지면서 어떻게 어느 때에 마셔야 제일 맛있을까 그 생각만 간절하게 하게 된다. 

책에서 한 말이 맞았다.

결핍이 사랑을 깊어지게 만든다고.

카페 내부 인테리어도 예쁘다. 꼭 테이블에 하나쯤은 그 날의 신문이 올려져 있다. 아무나 읽어도 된다.


그래서 호주에 와서도 커피는 내가 진짜 마시고 싶은 곳에서, 마시고 싶은 순간에 찾게 됐다.

호주식 커피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나라 카페도 꽤 많아질 만큼 이 곳엔 특별한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난 전문가가 아니니까 그 차이를 일일이 구별할 능력은 없다.

그냥 커피를 마실 때 그 날의 분위기, 공간의 편안함, 장소의 공기까지 한 번에 다 마시는 거라고 생각하면 역시나 특별할 뿐이다.

잘 마셨습니다.


층고가 높아서, 창이 커서 더 여유로웠던 no name lane에서의 커피 한 잔도 좋았다 나한텐. 충분히 평화로웠다.

생각해보면 밖에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평화로운 것'에 집착해왔을까 싶기도 하지만 뭐 꼭 총알이 날아다녀야 전쟁인 건 아니니까. 마음속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수도 있는 거다.

베이컨 종류가 많아도 너무 많다.


오늘의 저녁 장보기. 오늘 인생 첫 김치볶음밥을 만든다. 최대한 엄마가 만들어줬던 거랑 비슷하게 만들고 싶었는데 재료 고르기부터 난항이다.

한국에서도 내가 직접 베이컨 사 먹은 적은 없었는데 (우리 집은 베이컨을 못 먹게 한다.) 베이컨은 무슨 종류가 그렇게 많은지 이런 훈연, 저런 훈연.. 뭐가 일반적인 건지 알 수가 없다. 대체 영국 스타일은 뭔가.

김치볶음밥 한 번 해 먹으려고 재료를 무려 5개나 사야 한다.


난 그냥 한 번 해 먹어 보고 싶었던 거였는데 재료를 왜 이렇게 많이 사게 되는 건지. 사람들이 왜 그냥 밖에서 사 먹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나한테 부엌에서 서서 요리하는 사람의 이미지는 어렸을 때 봤던 아메리카노 마실 줄 아는 어른 같은 느낌이라 괜히 내 손으로 장을 보고 부엌에서 칼질을 한다는 것에 큰 뿌듯함을 느끼게 된다.

칼질할 때 묘한 희열도 느낀다.


요리할 때 제일 재밌는 파트는 재료 손질. 일단 뭘 끓이거나 튀기거나 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요리의 결과물이 내 손을 떠난 그런 통제불능의 안타까운 느낌인데 재료 손질할 때는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정말 좋다.

하나하나 까서, 자르고, 모아두다 보면 마음까지 정돈되는 기분. 물론 칼질은 아직 서툴지만.

도대체 이게 몇 인분인가.



나의 인생 첫 김치볶음밥. 

모든 음식에 그냥 치즈를 올려두면 웬만해선 다 맛있어진다는 걸 알게 됐다. 뭔가가 적당히 익고 맛이 올라오려면 불 앞에서 꽤 오래 서있어야 한다는 것도.


레시피에는 20분이면 된다는 걸 한 1시간은 걸린 것 같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 영화 <러브, 로지>.


넷플릭스로 영화 <러브, 로지>를 보면서 평화롭게 치즈 김치볶음밥을 먹으며 하루 마무리.

아주 아주 소소한 하루였지만 대신 확실한 행복이 많았던 그런 날이었다.

시간보다 너무 느리게 살지도, 너무 빠르게 앞서 살지도 말자. 그냥 딱 오늘만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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