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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ah Nov 16. 2020

#36 나의 작은 아킬레스건

작은 악당과의 전투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 종류는 참 다양해서 누군가에겐 그게 개인의 실력이나 능력치일 때도 있고, 신체적 결점일 수도 있고,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가족일 수도 있고, 경제적인 고단함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은 이상, 우리는 결코 그 무게감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없다. 생각보다 상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많아 겉모습만 보고 어림짐작할 수 없을뿐더러, 아무리 가벼운 문제일지라도 그 취약점은 살면서 그 사람을 여러 번 걸고 넘어뜨렸을 테니까. 

골드코스트의 패독 베이커리. 한글로 발음을 쓰니 조금 센 느낌이지만 커피와 베이커리로 정말 유명한 곳.


그런데 그 취약점이라는 게 너무 성질이 못돼서, 한 사람의 마음속 깊고 깊은 곳으로 들어가 평생을 세 들어 사는 것 같다. 난 쫓아내고 싶어 죽겠는데 나가라고 해도 말도 안 듣고 월세도 안 내면서 기어코 깊은 곳으로 숨어 들어가 찾아내지도 못하게 하는 작은 악당처럼. 이 작은 악당은 당당하지도 못해서 나의 불안감이나 괴로운 감정들을 틈틈이 훔쳐 먹으며 몰래몰래 덩치를 키워가지만, 숨어있는 장소를 들킬까 봐 절대 존재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

그런데 이 작은 악당이 존재를 드러내는 그 드문 순간과 타이밍이 있으니, 그건 내가 가장 방심하고 있는 시점이다. 쬐끄만게 어쩜 그렇게 눈치가 빠른지 싸워서 질 것 같으면 잘 나서지도 않다가, 내가 한껏 마음 놓고 행복을 즐기는 순간에 어김없이 그 존재를 드러내 그간 모아 온 모든 무기와 노하우를 써먹어 나를 잡아먹는 것. 그때 그 작은 악당은 내 마음속에 사는 대가도 못 내서 눈치 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기세를 몰아 위풍당당하게 이젠 주인 노릇까지 하려고 한다. 

울타리로 둘러싸여 Paddock bakery인가 보다. 정원 햇살이 따뜻하고 좋은데 나는 안에서 바라보는 걸 택했다. 오늘은.


가장 방심하고 있었을 때 작은 악당에게 처참하게 당하는 경험을 여러 번 겪다 보면 역시 교훈이라는 게 생기고, 때로 그 교훈은 꼭 논리적이지만은 않다. 애초부터 그 교훈이란 게 이기고자 하는 이성적 전략에서 온다기보다, 지기 싫은 감정적 대처에서 오는 거니까. 그럼 나는 슬슬 평소에도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행복하고 편안할 때, 그래서 내가 즐겁게 방심하고 있을 때 주로 그런 일이 많았으니까 이제는 그 순간을 200% 즐기지 않기로 결심하는 거다. 내가 너무 행복해하면 어김없이 그다음 순간엔 그 작은 악당이 나를 괴롭혔으니까 애초부터 그 악당에게 너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로.

안에도 바람이랑 햇살 잘 들어오라고 괜히 한 번 열어보는 창문.


근데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한 게 '너무 행복해하거나 방심하진 말자'하고 마음을 독하게 먹을수록 거꾸로 마음이 열린다. 방심하지 않으려고 늘 너무 긴장하고 지내다 보니까,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푸르른 하늘, 바다 냄새, 모래의 촉감에도 위로받게 되는 거다. 긴장하고 지낸 만큼 보답받고 싶은 기대심리였는지도 모르고, 작은 악당에게 티 내지 않고 몰래 행복해하는 방법을 터득한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 혼자만 아는 꼼수로 그 작은 악당을 달래고 속여가며 크게 티 내지 않고 몰래 작은 행복들을 누려왔는데, 그래서 딱히 마음 놓고 맘껏 행복해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그 망할 놈의 악당이 또 나타났다. 

손때 묻은 페인트와 책상의 아름다움을 서서히 알아가는 좋은 나이.


엄마가 다쳤다. 심장이 10센티 정도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 몸이 바짝 굳어있다가 정신이 차려질 때쯤 들었던 생각은 딱 하나였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 작은 악당 놈이 실물로 눈 앞에 나타난다면 정말 뺨이라도 때리고 싶었다. 아니 뺨보단 뒤통수. 너도 나를 매번 앞이 아니라 뒤에서 쳤으니깐 나도 똑같이.

사진이 너무 예쁘게 찍혔다. 심란하게시리.


며칠간 상황을 수습하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방법을 생각했다. 사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영화를 봤다. 영화는 우리의 인생보다도, TV 드라마보다도 러닝타임이 짧았다. 그래도 두 시간 정도 내에 사건이 해결되고 기승전결을 거쳐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모양새를 보고 있으면 안심이 됐다. 내가 보는 모든 스토리에는 정해진 갈등과 위기가 있었고 결국엔 엔딩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사진을  찍는 장소마다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카페였다.



하지만 내 인생이, 모두의 삶이 그러하듯 영화처럼 짧은 시간 안에 금방 나아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예정된 시간도, 미리 정해놓은 줄거리도 없다는 것도.


그래도 불현듯 힘이 세진 상태로 다시 나타난 나의 취약점이, 그 작은 악당이 지나간 모든 기억들을 사진처럼 생생하게 불러와 나를 겁먹게 해도 과거처럼 대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분명히 어디선가 문이 열리고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밑도 끝도 없는 낙천적인 마음도, 근거 없는 부정적인 태도도 지금의 나에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냥 모든 건 영원하지 않다는 그 사실에 기대서 쉬어볼 뿐. 그리고 행복하고 좋았던 추억들이 나를 더욱 괴롭게 만들지 않도록 마음을 굳게 굳게.

햇살과 그늘 조화 한 번 끝내준다.


이런 말하기 싫었는데, 역시 사람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상태일 때 가장 강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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