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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ah Dec 04. 2020

#38 우리들의 선의가 서로 만났을 때

제일 좋아하는 도넛 가게에서.

뉴스테드(Newstead)에 있는 도넛 가게 nodo. 백 번 가면 백 번 반하는 곳.


해외에 나와서 타인에게 길을 묻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뭔가를 물어볼 땐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친절하게 답해줄 것 같은 사람을 붙잡고 물어본다는 것. 이쯤 되면 길을 알려주고 안 알려주고는 큰 상관이 없다. 정확한 답을 알려주지 않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도 모른다'라고 말해줘도 괜찮으니까 친절하게 대답해줬으면 좋겠고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착해 보이는 사람만 고르고 골라 길을 묻고 있다.


내가 직접 겪고 나니까 왜 유독 사람들이 나한테 이런저런 부탁을 많이 하는지 이제야 알게 됐다. 나는 인상으로 보나 몸집으로 보나 공격성 제로로 보이니까. 대학교 다닐 땐 단짝 친구가 이런 말을 했었다. 도대체 너랑 다니면 모르는 사람들이랑 엮일 일이 왜 이렇게 많이 생기는지 모르겠다고. 


질문이든 부탁이든 뭐든지 계기가 되어 모르는 사람들이랑 엮이고 에피소드가 생기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도움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노숙자도 꼭 하고 많은 사람 중 나한테 다가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돈 달라고 한다던가, 길가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 가까이 걸어온다던가 하는 일들. 


근데 꼭 상대방의 탓은 아닌 게, 나도 좀 모르는 척을 하면 될 걸 그게 잘 안된다. 이왕이면 도와주고 싶은 것. 그 날 좋아하는 도넛 가게에서도 그랬다.

튀기지 않은 구운 도넛으로 유명한 곳. 근데 진짜 맛있다. 매일 가서 다 먹어보고 싶다.


도넛 먹는 것뿐인데 포크랑 나이프를 준다. 도넛에 진심인 가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도넛이 먹고 싶어서 Newstead 동네까지 찾아갔던 날. 나는 가게로 들어가 도넛이랑 커피를 고른 뒤 여덟 명쯤은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에 혼자 앉았고, 얼마 뒤 들어온 회사원 네 명이 업무 미팅 차 카페를 찾아왔는지 같은 테이블에 앉아 건축도면을 펼쳐놓고 각자 노트북을 꺼냈다. 에어팟으로 노래를 듣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들려오는 대화들. 업무를 해야 하는데 와이파이가 연결되지 않는 것 같다. 머리를 맞대고 이리저리 수군거리더니 네 명이 동시에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나를 쳐다봤다.


'나도 와이파이 아이디랑 비번 몰라. 직원한테 한 번 물어봐봐.' 

나는 이 한 마디를 못한다. 

이 한 마디를 못해서 얼떨결에 그 사람들 자리로 다가가 노트북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고 이 카페에서 와이파이를 쓰려면 Facebook에 로그인한 뒤 가게 체크인을 해야 한다는 걸 알아냈다. 그 사실을 알려주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자리로 돌아왔는데, 도대체 이들은 왜 아직도 수군거리는 건가. 에어팟에서 노래는 흘러나오는데 노래는 안 들리고 틈새로 새어 나오는 이들의 대화 소리만 자꾸 들렸다. 세 명은 Facebook을 안 하고, 한 명은 오랜 시간 로그인을 안 해서 비밀번호를 잊어버렸다. 


내적 갈등 끝에 그냥 그들의 노트북에 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넣어 SNS 로그인을 해줬다. 설마 이렇게 도와줬는데 내 아이디로 들어가서 뭔가를 결제한다거나 나쁜 짓을 하지는 않겠지. 자리로 돌아와 커피를 마시는 내내 그들은 일을 하고, 나는 혹시 모를 상상을 하고. 이렇게 의심할 거면 애초부터 도와주긴 왜 도와줬는지. 

정말 사람 일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내 상상과는 다르게 이들은 꽤 열정적으로 회의에 빠져들었고 나도 내 도넛과 커피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업무 미팅이 끝나갈 즈음 네 명은 다시 동시에 나를 쳐다봤고, '네 페이스북 로그아웃했어 걱정하지마'부터 시작해서 본인들이 하는 일, 오늘의 미팅 주제, 건축도면 소개, 자기소개, 고민 중인 점심메뉴들까지 말하기 시작했다. 바로 옆 햄버거 가게가 오늘 할인하는 요일인데 될 수 있으면 점심 같이 먹었으면 한다는 말도 같이. 


1대 4로 대화를 이어나가기엔 낯가림이 심한 나는 이제 요가 갈 시간이라는 핑계를 댔고, 이들은 괜찮다는데도 내 도넛과 커피값까지 계산한 뒤 차로 나를 스튜디오에 데려다주고 다시 햄버거 가게로 돌아갔다. 더 이상의 거절은 못하겠고 설마 안 잡아가겠지 하는 묘한 의심과 함께 Newstead를 떠났던 그 날. 


이 건물에서 내가 사는 집도 보인다. 



그 뒤로도 종종 연락하고 지내곤 하는데, 그들이 만들던 건물은 어느덧 84층에 이르러 브리즈번 도심 어느 방향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날 차에서 내리는 순간까지 은근히 경계했던 거 미안해. 영화 <테이큰>을 너무 많이 봤다.

여러모로 따뜻한 야경.


근데 오늘 문득, 그 날의 나의 선의와 그들의 선의가 다시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커피를 사들고 도서관에 갔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 빈자리가 없었던 것. 자리가 나길 기다리는 나 같은 사람들이 여럿 서성대고 있었다. 대충 자리가 날 때까지 뭉개 보려고 노트북, 커피, 에코백, 가디건을 양손에 들고 작은 간이의자에 앉아있는데 맞은편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계시던 어르신이랑 눈이 딱 마주쳤다. 너무 부산스러웠나 싶어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그 어르신이 날 불렀다. 여기 내 자리에 앉으라고. 


내가 양손으로 느릿느릿 짐을 챙기는 사이에 혹시 다른 사람이 앉을까봐 그 자리를 지키고 서 계시던 분. 내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모습을 보고 엄마 아빠가 생각났다.

나는 여전히 밤에 불을 켜고 잠들지만
이 도시는 이미 아늑하다.


도시는 늘 낯설다. 낮은 낮대로 바쁘고, 밤은 밤대로 화려해서.

이 각박한 도시 속에서 다들 먹고 사느라 어찌나 바쁜지 때로 친절은 오지랖으로 둔갑하기도, 불필요한 시간 낭비로 여겨지기도 한다. 쌩하니 새침데기처럼 구는 어른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더 꼭 쥐게 되기도.


그래도 믿고 싶다. 매번 이 낯선 도시를 익숙하게 만들어주는 건 다 별 거 아닌 것들이라고. 우리들의 선의가 꼭 그 자리에서 보답받진 못하더라도 언젠가 그 선의들이 돌고 돌아 이 도시를 좀 더 아늑한 곳으로 만들어줄 거라고. 


사람 사는 거 다 별 거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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