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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랑 Jan 21. 2017

첫눈 일기

작년 첫눈의 색



 어릴 때부터의 오랜 습관 덕분인지 저는 책에 나오는 것이라면 뭐든지 쉽게 믿어버리곤 했습니다. 대학생이 되어 여성간호학을 공부하다가 저 자신이 아무래도 식이장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이 바로 이번 학기입니다.


 사춘기 소녀들이나 젊은 여성들이 많이 앓는 증상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 나이에 걸릴 법한 병치레는 징검다리 밟듯 꼭꼭 지나 왔기 때문에, 그리고 고등학생 때부터 제가 '먹어왔던' 것들을 생각하면 아주 그럴듯해져서 나중에는 마치 책이 저에게 왜 이걸 이제야 알았느냐고 질책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신빙성이 생겼습니다.

 또한 그런 심증이 책이랄지 아니면 어떤 사람이랄지, 하다못해 영 어설픈 약을 권유하는 판매원에게라도 입증이 되면 저는 슬프게도 아무 의심 없이 그러마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인생이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아마도 그런 성격이 한몫했을 것입니다.

 눈동자를 보면 건강을 다 알 수 있다던 고모가 아홉 살 즈음이었던 저의 눈을 보고는 '아이구'하며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아직까지도 매년 알 수 없는 약들을 보내 오는 것이나, 중학생 시절 겨우 써서 냈던 반성문을 읽고는 저에게 글을 한 번 써 보는게 어떻겠냐고 하던 나이 많은 음악 선생이나, 훌쩍이며 고해성사를 마치고 나자 기도를 하면 나아질 거라는 신부님이나, 혹시 집에 예전에 죽은 어린아이가 있지 않냐고 묻던 웬 낯선 사람이나.....


 12월이 며칠 안 남았던 어느 추운 밤 기분 좋게 술을 먹다가 저는 그대로 조용히 화장실에 가서 손을 집어넣어 속을 게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한 살 위인 동기가 따라나왔지만 취한 탓이라고 여길 테니 거리낄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속이 나아졌다는 것보다도 이로써 식이장애라고 조그맣게 써 넣었던 곳에다가 아예 온점까지 꾹 눌러 찍었다는 느낌에 기분이 좋아져서는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날 집에 오는 길에는 동기가 미적지근한 꿀물까지 손에 쥐어 주더니 수면제 없이도 아주 단잠을 자고 일어났습니다.

 그 날 저는 올해 첫눈을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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