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오 연 남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지 Dec 15. 2019

오, 연남/UNICUS_01

[수지]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연남동 카페 분해하기 


오, 연남! 

어쩌다 연남에서 함께 살게 된 다섯의, 

로컬 맛집 리뷰 프로젝트


첫번째 공간 / 카페 우니쿠스(UNICUS)



그래픽 디자이너는 명함에서 살의를 느낀다.


라는 칼럼을 (아마도 브런치에서) 본 적 있다.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2000)’의 주인공 패트릭이, 명함을 주고 받는 사소한 상황에 살의를 느끼는 걸 그래픽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풀어낸 흥미로운 칼럼이었다. (다시는 가라몬드 서체를 무시하지 마라!)

(url을 연결해두었으니 궁금하신 분들 타고 가세요.)


Photo (c) 2019. 샤인. / 보정 SUJI.


재미있기도 하고 공감도 돼서 오래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에 수렴하는 관점에서 내게 첫 우니쿠스는 찬사에 가까웠다고 하면 좀 웃길까. 카페에서 회의할 때 주변 물건들을 괜히 각 맞춰 정리하는 습관이 있는 내게, 우연히 올려둔 우니쿠스 쿠폰 종이가 핸드폰 액정 크기에 딱 맞았단 게 별거 아닌 이유라면 이유다. 




그래픽 디자이너는 카페 쿠폰에서 쾌감을 느낀다(?) 덧붙여 나는 iPhone SE를 쓰고 있는데 액정 크기가 명함사이즈인지 처음 알았다. 진짜 작구나..



적고보니 꽤나 그럴싸한 것 같다. 생각해보면 좋아하는 카페를 떠올려 볼 때, 카페의 쿠폰이나 명함, Wifi 패스워드를 적어놓은 출력물이나 무가지들에 나는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꼭 완벽한 자간 행간, 아름다운 브랜딩이 아니더라도 그 공간만의 정체성과 특별함, 결이 느껴지는 텍스트들. 

당장 연남동에 이사오고 알게 된 애정하는 몇몇 공간들을 떠올려봐도 그렇다. 처음 가는 가게에서 나는 꼭 제일 먼저 그것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짐이 될 걸 알면서도 바리바리 인쇄물을 쟁여온 날엔 언제나 나의 지도앱 즐겨찾기란에 파란 하트가 붙곤 했다. 


반듯한 크라프트지에 말발굽 같은 로고, 아무렇게나 도장으로 쾅쾅 찍어주는 '우니쿠스 커피'. 거친듯 정직한듯 정돈된 듯 정갈한 듯. 고작 그 작은 쿠폰 종이 하나에서도 나는 이렇게나 많은 인사이트를 찾아내는 최고의 디자이너니까! (갑자기?)

 


직업병인지 개인의 취향인지, 조금은 강박적이게 느껴지는 '그리드와 각이 딱 맞았을 때'의 쾌감은 뒤로 하고서라도 공간이 주는 느낌이 그러했다. 


안도타다오의 건축물을 떠올리게 하는 길고 유려한 창들. 여느 카페들과는 다르게 우니쿠스의 벽에는 그림도 액자도 포스터도, 아무 것도 붙어있지 않다. 카운터 안쪽의 꽃밭을 달리는 말 사진이 겨우 하나. 


몇몇 있는 창들은 전부 시선이 직접적으로 닿지 않는 위치와 형태로 자리한다. 안도 타다오의 '빛의 교회'가 떠오르는 모양.


창에 비치는 것들에 시선을 빼앗기지도, 주변의 다른 것들에 방해받지도 않으니, 오히려 마주앉은 상대나 대화, 커피나 책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연남동의 몇 안되는 조용하고 대화하기 좋은 카페 중에 하나다.) 

가장 좋았던 건 가로로 긴 창이 있는 자리. 시선 아래 창이 있어서, 바깥 담을 그림처럼 바라보며 차 한잔 하기 정말 좋아보였다. 좋은 사람과 대화하며 시선을 나누면 더없이 행복할 것 같아 보였던 공간. (절대 커플이 앉아있어서 그렇게 느꼈던 거 아니다.)  



샤인이 마시던 아인슈페너. 마시는 모양이 제주의 오름같았다가, 또 파도 같아져서 너무 아름다웠다.


추천메뉴는 단연 아인슈페너. 깊은 티라미수 맛이 난다. 

커알못인 나에게도 먹어본 중 가히 최고라 부를만한 아인슈페너. (물론 나는 오렌지 선라이즈를 시켰다. 커피는 좋아하지만 체질 상 카페인을 너무 잘 받아서 자제하는 편이거든.)

와중에 샤인이 마시던 아인슈페너 모양이 너무 아름다워서 감탄했다. 오름같기도 파도같기도 한 패턴.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Graphic Poster (C) 2019. SUJI. 우니쿠스에서 받은 느낌을 표현했다. 아인슈페너 패턴에서 영감을 받은 파도와, 나무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한옥천장. 묵묵한 울림


디자이너의 관점이라고 해봤자 거창할 게 없겠지만, 다른 사람들보다는 공간이 주는 분위기와 이미지, 첫 느낌에 많은 영향을 받는 편이다. 

커피는 잘 알지 못하니까 음료의 맛이나 퀄리티보단 공간에 집중하는 편이고, 그런 상황에서 이런 사소한 흥미로운 경험은 내게 아주아주 긍정적인 이미지로 작용한다. 


한옥 천장을 살린 나무결이나, 말발굽같은 로고, 유일하게 붙어있는 말 사진.

라틴어로 únĭcus는 '단 하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어쩐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을 했다. 카페라기 보단, 갤러리 같은 느낌. 방문하는 사람들의 결 하나 하나가 이 작고 따뜻한 갤러리를 채우는 그림들 같은 느낌. 


연남의 이 작은 카페가, 오래 거기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 연남 다음 매거진]


오, 연남/프롤로그_00

오, 연남/UNICUS_01 [수지]

오, 연남/UNICUS_02 [난희] 

오, 연남/UNICUS_03 [테드]

오, 연남/UNICUS_04 [빼미]

오, 연남/UNICUS_05 [샤인]





매거진의 이전글 오, 연남/다섯 명의 브랜더_0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