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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채영 Jul 12. 2019

나의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마지막 방학

워킹홀리데이 그 후 1년, 다시 돌아온 유럽

가난하고 풍요롭다니. 참으로 모순이다. 그러나 사실이다. 어찌어찌해서 다시 더블린에 오긴 왔는데, 너무 가난한 거지. 지나가면서 보는 갖고 싶은 물질을 나는 살 수 없다. 어제는 테스코에서 3유로짜리 돼지고기와 1유로짜리 베이컨 중에 고민하다 베이컨을 샀고 가장 싼 49센트 스파게티면과 50센트 마늘을 샀다. 그럼에도 좋았던 건 지금이니까.



언젠가 유럽에 살면서 30대의 나의 여행은 먹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했으면 좋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말이다. 아마도 그때가 되면 가난함에도 무턱대고 올 수 있는 지금의 나를 부러워하겠지. 부러워하지 마라, 30대의 너도 충분히 부러운 삶을 살고 있을 테니. 여행한 지 20일째, 나는 오늘 아무것도 안 했다. 이렇게 혼자서 하는 장기여행은 처음이라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있다만, 이제 더블린에서의 날들도 지금 이 밤을 포함하면 두 밤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오늘 아무것도 안 한 이 날이 후회스럽려나.



그럼에도 장기 여행자에게 중요한 것은 호흡이라고, 나는 쉼을 또다시 배우고 있다고, 일상을 살며 놓는 법을 또 잊어버렸었는데 그 감을 다시 되찾고 있는 거라고. 원래 운동할 때도 말이다. 운동이 다 끝나고 쉬는 시간에 에너지가 더 타는 거랬다. 그러니까, 쉬는 시간까지 운동인 거지. 여행에 비유한다면, 시공간을 이동하는 운동을 하고서는 쉬어야 하는 것이 맞다.



가난하지만 풍요롭다면, 무엇이 풍요로운가?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하는데, 사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아직도 나는 조급하고, 여유롭지 못한 것일까? 그럼에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일상에 우선순위로 두고, 그것을 사유하고 느끼고 싫증이 나면 안 해버리면 그만인 지금이 너무 좋다. 오롯이 “나”가 우선순위인 지금. 참 그리고 유튜브도 미루고 미루다 시작했다. 드디어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오른다. 눈에도 보인다. 그 말은 진짜 내가 나를 내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는 것이니.



5개년의 계획을 세우다가 나 또 뭐 하는 건가? 싶었다. 내 취미는 계획이요. 특기는 기획이니. 그래, 내 삶을 꾸리고 계획하는 것은 언제나 옳고 좋고 재밌는 일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적어도 지금은, 그냥 이 순간을 즐기자고. 내일은 수녀님을 만나 뵈러 가야겠다. 한국에서 가져온 선물을 가지고.



19년 7월 12일 금요일

더블린에서의 마지막 날 밤 하루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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