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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Dec 21. 2021

한 번 만났지만...

1일 1드로잉, 그림자노동

#157일차


이반 일리치를 처음 알게 김종철 선생님을 통해서다. 충무로의 어느 인문학 공동체 오픈 강의에서 김종철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신문기사나 환경 관련 글통해 선생님을 익히 알고 있어서 내겐 유명인을 보는 같았다. 늦은 저녁 10여 명 모인 작은 강의실이었다. 나도 선생님 강의가 있다는 온라인 공지를 보고 찾아간 외부인이그곳이 낯설었지만 앞에 김종철 선생님은 눈에 띄게 어색해하셨다.


선생님은 부자연스러움을 숨기지 않았고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하나 결정하지 못해 눈길을 허공에 던지며 청중을 곁눈질하듯 힐끔힐끔 쳐다보며 강의했다. 연신 입꼬리에 고이는 침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인류학자가 고립된 섬에 들어갔는데 놀랍게도 그곳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안정형 애착관계를 맺으며 평화롭게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다. 인류학자가 오랜 시간 현지에 머물며 관찰한 결과 아기를 잠시도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냈다. 누구의 자녀라는 부모 소유를 따지지 않고 마을 사람들이 공동 육아하며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지 않았다는 것은 해리 할로우 원숭이 실험의 의미와 연결되었다.


김종철 선생님은 문이과를 구분하는 교육의 폐단으로 자본주의와 결탁한 유전자공학을 심각한 문제로 꼽았다. 유전학을 연구하는 이과형 과학자들이 윤리적 사고나 철학이 부재해 맞춤형 아기와 같은 무서운 생각을 현실화하고 있다고 걱정스러워했다. 얼마 전 우치다 타츠루의 이야기와 교집합 되는 부분이다. 일본의 한 세미나에서 산부인과 의사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산부인과 의학 기술이 발달해서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하기 전에 이미 유전적 질환이 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고 했다. 착상되기 전에 태아의 건강 상태를 알 수 있어서 장애아나 가지고 있는 유전질환을 판단해서 임신중절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명이 탄생하는 신비한 영역까지 인간이 관리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아기를 인간과 야생의 중간층에 있는 존재로 본다고 한다. 인간이 손댈 수 없는 야생에 걸쳐 있는 존재이므로 일본의 전통적 아동관은 아기를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고 자연의 섭리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유전자 지도 전부를 파헤치고 관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윤리적 가치나 도덕적 책임으로 성찰하지 않은 생명공학 기술은 종국에 칼이 되어 인간을 겨누게 될지 모른다.


선생님은 투덜대며 체념조로 위와 같은 이야기를 하더니 자신은 살만큼 살아서 파국으로 가는 지구 문제를 볼 날이 얼마 안 남아 다행인데 2-30대인 청중들은 안됐다며 꼬숩다는 듯이 혀를 찼다. 선생님은 시종일관 블랙유머를 구사하며 청중을 무시하는 것 같았다.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칠판 앞을 어슬렁 걸으며 어수룩한 태도로 대충 말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청중의 듣는 태도나 표정, 이해정도를 헤아리며 밀도있게 강의를 꽉 채웠다. 헤어질 때가 되자 많이 아쉬웠고 여러 번 만나 익숙해진 것처럼 희한하게 정이 들었다. 코로나19로 혼란스럽던 작년 6월 신문기사에서 선생님의 부고를 들었을 때 70대였던 선생님이 일찍 세상을 떠난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살아계실 때 자주 강의를 찾아들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들고 선생님의 타계 소식에 너무 조용한 세상이 서운했다.


오늘 드로잉으로 이반 일리치의 <그림자 노동> 책 표지를 따라 그렸다. 산업사회가 임금 노동의 보완물로 무급으로 착취하고 있는 그림자 노동- 가사노동, 장보기, 출퇴근 시간, 소비 스트레스, 벼락치기 시험공부 등이 신비화되어 여성에게 전유되어 온 것을 지적했다. 나도 학교에서 아이 문제로 연락할 때 학생의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편해서 학생 어머니와 통화하려는 습성을 볼 때마다 스스로 반성하게 된다.


이반 일리치의 또 다른 책 <전문가들의 사회>도 필독서에 속한다. "의사, 변호사, 직업 정치가... 전문가들은 어떻게 권력을 독점하고 자신의 이익을 지켜왔는가? 그들이 제공해온 '서비스'의 실체는 무엇인가? 인간의 타고난 능력을 무능력으로 규정함으로써 어떻게 우리들 나머지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었는가?"  뭐만 하려고 하면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또는 전문가를 불러보자는 식으로 우리가 시간을 들이면 할 수 있는 문제도 외부 전문가에 의지해 서둘러 해결하려는 모습을 종종 본다. 옷 정리마저 전문가가 와서 해주니 말이다. 내 문제를 누군가 대신해주면 나의 주체성이나 내 고유성은 사라지고 나 라는 존재는 전문가에 의해 윤색된 빛깔만 남을 것이다.  


우리의 시간과 노동은 돈으로 환산될 뿐 나 자신을 위해 쓰이지 못한다. 그렇게 번 돈은 대부분 아파트 집값에 파묻히고 대출이자 메꾸느라 쳇바퀴에서 내려오지 못한다. 집값이 올라야 조금이라도 희망이 보이는 열차에 탑승해 누구도 감히 열차를 멈춰 세우지 못한다. 초등학교의 경우 부모님이 맞벌이하느라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학원에 보내는 일이 많다.


김종철 선생님이 번역한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도 읽어봐야겠다. 이 책은 이반 일리치와 절친이었던 리 호이나키가 썼다. 이반 일리치와 리 호이나키는 둘 다 카톨릭 사제였다가 나중에는 대학 강단에 섰다. 읽어야할 책들이 쌓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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