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윤이한테 참외 깎아주고 앉아있는데 문득 너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어. 아기도 잘 크고, 우린 서로 사랑하고, 날은 좋고 집도 깨끗하고..."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피식 웃음이 나와 카톡창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참외와 행복이라니, 어제 오랜만에 집 청소를 했더니 기분이 좋아진 건가. 하지만 확실한 건 그 순간 내가 너무 행복했다는 사실이다. 행복하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만큼 작은 일상의 조각들에 나는 제법 커다란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눈물 나게 행복한 순간.
믿기지 않을 만큼 행복한 순간.
그런 순간이 내게도 오다니. 하루 종일 독박 육아에 시달리고, 아직 우리 이름으로 된 번듯한 집 한 채 없는데... 행복이라니. 내가 꿈꾸었던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아 보였는데, 신기하게도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오빠. 나 오늘 너무 행복한 거 있지.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좋네. 고마워."
내가 행복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는 남편의 휴일. 아이를 데리고 근처 바닷가 공원에 나가 짧은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유명하다는 우동 집에 들러 점심 한 끼를 해결한 것을 빼고는 별다를 것이 없는 날이었다. 그저 아이에게 비눗방울을 몇 번 불어주고, 나무계단을 함께 오르내렸을 뿐.
무언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들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끝내 나는 남편에게 행복하다는 단어로 내 마음을 표현했다. 어떻게든 그때의 감정을 밖으로 꺼내서 보여주고 싶었다. 누군가에게는 시시하고 별 볼 일 없는 하루였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특별하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신기한 건 행복도 작은 성공 경험 같은 성질을 가졌는지 그 뒤로도 나는 자주 그 날 만큼 행복했다는 것이다. 행복에도 역치라는 개념이 있다면 그 날 이후 나의 행복 역치는 현저하게 낮아진 것이 분명했다. 눈부신 햇살 아래 쪼그리고 앉아 개미 구경을 하는 아이가 예뻐서 행복했고, 정신없이 만들어 낸 요리가 생각보다 맛있어서 행복했고, 남편이 퇴근길에 사 온 작은 쿨피스 한 통에도 나는 행복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렸을 적, 내게 눈물 나게 행복한 순간은 항상 무언가 커다란 성취와 연결되어 있었다. 예상보다 시험을 잘 본 날이었던지, 기분 좋은 합격 소식을 들었던 날이었던지... 나는 뭔가를 이룬 날에 행복했다. 반대로 생각하면 작은 성취라도 없는 날은 내게 그저 그런 평범한 일상으로 치부되었다. 평상시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내게 성취가 오는 빈도도, 성취의 크기도 달라졌기 때문에 일상으로 불리는 날에 나는 항상 종종거렸다. 열심히 노력해서 내가 행복을 느끼는 날을 더 늘리고 싶었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나를 더 조아 매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가끔씩 너무 힘들고 지치는 날에는 행복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내가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누군가가 성취를 이루고 있으면 부러워하고 시기 질투했다. 내가 행복하지 않을 때, 그는 행복해하고 있을 것이 뻔하니 타인의 행복을 탐냈다.
자연스레 더 빨리 이루기를 꿈꾸었고, 가끔은 내게 주어진 환경 탓도 했다. 조금만 더 가지고 있었더라면 이루었을 텐데, 저 사람이 조금만 더 도와줬더라면 이루었을 텐데... 그랬다면 나도 행복해질 수 있었는데.
항상 타인의 성취에 관심이 많았고, 내가 더 크게 성공하리라 마음먹었다. 좋은 집에 좋은 차, 어떤 직업에 어떤 표정, 이만큼의 재산과 저만큼의 인맥. 나의 행복은 가슴속이 아니라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그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서 더 달려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아이를 낳고, 잠시 회사생활을 접고 집안일을 하면서 행복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었다. 아니 바뀌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견딜 수 있었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내가 살아내기 위해 내 행복의 기준을 새로 써야만 하는 시간을 지났다.
나는 아직도 젊었으나 나보다 더 젊은 사람들보다 열심히 할 체력이 없었고, 쏟아부을 시간도 없었다. 갓 돌이 지난 아이를 두고 밤낮없이 일을 하는 건 고사하고, 덜컥 퇴사를 해 소속도 없었다. 업무로 이뤄낼 성취랄 것의 토대조차 없어진 것이다.
내 마음이 온탕과 냉탕을 오가기를 여러 날. 나는 조급하게 마음을 끓이기보다 내가 더 행복해지는 길을 택했다. 오늘 하루, 내게 주어진 순간에 감사하는 것. 복잡한 생각들에 얽매이지 말고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 내 마음을 바꾸자 무엇보다 아이가 달라 보였다. 한번 더 안아주었고, 두 번 더 웃어주었다. 그리고 세 번 더 기다려 줄 수 있게 되었다.
두어 개 내밀기 시작한 작은 이빨로 아이가 단번에 커다란 과일을 씹어 먹을 수 없듯이.
조그맣고 통통한 두 발로 단번에 걸음마를 할 수 없듯이.
어쩌면 우리의 행복에도 작은 연습들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연습과 훈련, 경험의 순간들이 반복되고 그것들이 쌓여 나의 인생이된다면 나는 오늘 작은 행복을 연습하는데 더 집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