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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코포니 Dec 01. 2022

카코포니 싱글 '황홀한 실종' 작업기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나는 당신을 실종시킬 거예요.



정말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씁니다. 어떤 생각과 어떤 어조로 이전에 썼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시간이 흘렀네요. 원래는 2집에 대한 이야기도, 문소문의 발매에 관한 이야기도 나눠볼까 했는데 도저히 마음에 여유가 없어 찾아오지 못했습니다. 


사실 작년 발매했던 EP 앨범과 영화 [Reborn]을 작업하면서 제가 전하려던 메시지와는 정반대로 많이 고갈되었습니다. 작업자로서의 자존감,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고 제가 믿었던 관계에 대해서, 예술가로서의 긍지에 대해서, 프로페셔널함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오래 홀로 걸었습니다. 제자리걸음처럼만 느껴져서 좌절도 많이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다시 새로운 노래로 돌아왔다는 것은 많이 회복했다는 의미겠지요. 부러진 관계들 말고, 여전히 남아있는 관계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흔들렸던 나의 예술관에 끊임없이 물음을 던졌고, 오히려 다시 나의 예술관을 단단히 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다른 사람의 작업에 많이 참여하면서 제 나름대로의 프로페셔널함에 대해 제대로 정의 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의 삶에서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정답이다,라고 다시금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Reborn] 작업을 통해서 죽었고, 또 그 작업을 통해 작품의 이름처럼 다시 태어난 것 같습니다.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다시 태어난 카코포니의 '황홀한 실종'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카코포니가 앨범의 선공개 개념의 싱글 말고, 정말 싱글을 내는 경우는 처음입니다. '귀환'은 2집의 수록곡이었고 '사랑의 바다'는 EP [Reborn]의 수록곡이었습니다. 둘 다 어떤 큰 이야기의 일부였죠. 


반면에 이번 '황홀한 실종'은 이 자체로 완결성이 있는 노래입니다. 보통은 제가 큰 흐름이나 이야기를 잡고 수록곡들을 쓰는지라, 제 원래 작업 방식과는 굉장히 다르게, 독특하게 튀어나온 곡입니다. 그래서 싱글로 발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곡을 쓰게 된 계기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노래 연습을 하다가 갑자기 영감을 받아서 녹음 버튼을 누르고 쭉 부른 노래가 바로 황홀한 실종입니다. 벌스부터 싸비까지 한 번에 멜로디가 나온 경우는 오랜만이었어요. 1집에서는 '숨', 2집에서는 '이 우주는 당신'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아요. 원래 피아노로 곡 스케치를 하는 저인데, 이 곡은 기타가 끌고 가야 할 것 같은 생각에 거누를 불러서 바로 멜로디에 맞는 기타 코드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거누가 바로 곡의 분위기를 캐치해서 섹시한 기타 리프를 만들어줬어요.


싸비 부분의 멜로디가 캐치해서 이 부분의 가사는 고민 없이, 아니 사실 처음 녹음을 하는 과정에서 바로 떠올렸습니다. 


사랑을 줘 사랑을 더 사랑을 줘
가득히 줘 가득히 더 가득히 줘



무언가 홀린 듯이 갑자기 떠올린 노래였고, 곡의 분위기도 무언가에 매료된 것만 같았어요. 이 곡에 맞는 주제와 가사는 무엇일까, 저렇게 싸비의 가사처럼 사랑을 달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심리는 무엇일까 곰곰이 고민했어요. 가사도 특정 부분만 완성했어서, 내가 떠올린 곡인데 마치 베일에 감싸 져 있는 것 같았어요. 

이 멜로디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가, 심리가 뭘까.

그런 고민 끝에 써 내려간 가사입니다. 


까만 머리칼

영원 속의 흰 얼굴


키스도 차갑게 

나를 초대했지 


침묵 속의 

황홀한 실종이

나를 꿈으로 데려가네


사랑을 줘

사랑을 더

사랑을 줘

죽어있는 당신아


가득히 줘

가득히 더

가득히 줘 

내가 원하는 대로


짙은 눈동자

나만을 바라보네


키스 한 번 더

그 입을 다물어줘


침묵 속의 

황홀한 실종이

우리를 완벽하게 해


사랑을 줘

사랑을 더

사랑을 줘

죽어있는 당신아


가득히 줘

가득히 더

가득히 줘 

내가 원하는 대로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나는 당신을 실종시킬 거예요.



전작 [Reborn]의 에일리언은 '내'가 없는 사랑이라면, 이번 싱글 [황홀한 실종]은 '상대'가 없는 사랑입니다. 
둘 다 상대방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건 맞아요. 다만, 사랑의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 매우 다릅니다. 에일리언의 경우에는 상대가 너무 빛나서 나를 숨기고, 나를 없애고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맞추는 사랑의 방식이라면, 황홀한 실종의 경우에는 내가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이 마음 상태를 즐기기 위해서 그 사람이 누가 되었든 상대가 자신의 이상이라 여기는 방식입니다.


사실 제가 쓰는 사랑 노래는 대부분 '에일리언'의 화자의 입장에서 썼어요. 이는 현실세계에서 카코포니가 사랑에 임했던 입장입니다. 항상 관계 속에서 내가 낮은 사람이고, 내가 맞추어주고, 매일 몰래 울고, 상처받고. 


하지만 서론에서 썼듯이 다시 태어난 저는 이상적인 상대를 만났을 때의 감정에 휘둘리기보다는 즐기기로 결정합니다. 상대방을 실종시켜서 제가 원하는 황홀함에 빠지려고 합니다. 너무 사랑에서 아프기만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리고 또 너무 예쁘기만 하고 올바를 필요는 없잖아요.



사실 '황홀한 실종'은 완성되기 이전에 여러 편곡 버전이 존재했습니다. 미발매 신곡을 불러야 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이 곡을 부르기로 결정했어요. 그런데 당시 영화음악과 다른 뮤지션의 앨범 프로듀싱 작업으로 도저히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한 뮤지션 친구들인 17 peri와 알마에게 편곡을 부탁했었어요. 정말 새롭게 편곡이 되었는데, 이 버전도 너무 멋지고 좋았어요. 다만, 제가 원래 그리던 그림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라 발매까지 이 버전으로는 갈 수 없다고 결정했어요. 너무 멋져서 그랬던 것 같아요.


또 지난 8월에 있던 피아노 단독 공연 <숨의 여름>에서 셋 리스트가 하나 비어, 이 곡을 피아노를 맡아준 완기 오빠에게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어요. 그랬더니 마법처럼 뚝딱 피아노를 연주해 준 덕분에 또 완전히 색다르게 편곡 버전으로 공연했습니다. 이 피아노 버전은 제가 상상했던 노래의 분위기는 아닌데, 또 다르게 황홀해서 너무 마음에 들더라고요. (그래서 곧 유튜브 영상으로도 <숨의 여름> 때 불렀던 피아노 버전의 '황홀한 실종'을 공개할 예정입니다.)


어쨌든 이 두 훌륭한 편곡을 거쳤지만, 역시 제 머릿속에 저만의 완성이 존재하다 보니 제가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쁜 일정이었지만, 틈틈이 열심히 작업했습니다. 


드럼 비트는 굉장히 심플하게 작업하려 했고, 대신에 박자와 조금씩 어긋나는 퍼커션 소리들로 혼란스러운 관계의 상황을 드러내려 했습니다. 베이스에서는 굉장히 고생을 했는데, 강력한 라인이면서, 독특한 질감이면서 곡의 분위기와 어울릴 수 있도록 정말 온갖 방법을 마다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트럼펫, 트롬본의 브라스를 추가했습니다. 사실 브라스를 이렇게 제대로 편곡에 써본 적은 없는데, 브라스가 아니면 원하는 분위기를 낼 수 없을 것 같아 공부해서 편곡을 진행하고, 연주자에게 부탁해 녹음을 받았습니다. 브라스로 더 몽환적이고 꿈같은 분위기를 내려고 했어요. 그 이후의 부족한 사운드의 부분은 거누에게 특정 기타를 부탁해서 추가로 받았고, 신디사이저로 채워냈습니다.

마지막으로 노래도 매혹적으로 부르려 했어요. 사실 너무 잘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내뱉었습니다. 녹음실 가면 이 느낌이 안 날 것 같아서 작업실에서 편하게 녹음한 파일을 음원에 그대로 썼습니다. 튠도 거의 안 했어요. 최대한 날 것이지만 매력적이게 들리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보컬 프로듀싱을 할 때에도 관능적일 수 있게 해석될 수 요소들을 틈틈이 넣었어요. 특히 숨소리와 입 소리를 의도적을 배치했습니다.


다른 일정들로 바빴던 탓도 있지만, 원래 제가 편곡을 하는 시간보다는 훨씬 오래 걸렸던 곡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만든 사운드 하나하나, 사운드 배치 하나하나에 정감이 갔고, 엔지니어에게 이 모든 걸 전달할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어서 믹스도 제가 직접 하며 곡을 마무리했습니다. 


대신 마스터링은 그래미상 노미네이트만 수십 번 되었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엔지니어에게 부탁했습니다. 여성 보컬의 노래를 특히 매력적으로 마무리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맡겼어요. 정말로 제 믹스를 정말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주며 완성을 시켜주었습니다.



대망의 뮤직비디오와 사진 작업입니다.


제가 다른 작업들 속에서 눈여겨보았던 Noko 감독님과 함께 사진과 뮤직비디오 작업을 진행했어요. 곡과는 또 완전히 다른 주제로 뮤직비디오가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과 이 곡을 들은 다른 창작자의 해석이 궁금해서 스토리라인에 큰 참여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야기를 나누다가 레퍼런스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한 장면을 보여주었고, 감독님도 이 장면을 너무 좋아해 주셔서 비슷한 톤으로 진행하기로 했어요. 미팅을 하다 보니 관객의 역할이 필요해졌는데, 도이가 흔쾌히 출연을 해주겠다고 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도이는 [Reborn]을 공동 연출해 주었던 저의 동료이자, 제가 너무 사랑하는 친구인데요, 배우와 만화가로 활동하고 있어요. 사실 이전에 함께 뮤비를 찍기는 했었는데 저의 역량 부족으로 완성을 못 시켰습니다. 그래서 꼭 함께 다시 출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와중에 자연스럽게 다시 함께 출연하게 되어서 너무 다행이었고, 행복했습니다. 


또 감독님께서 도이가 나온 뮤직비디오를 보고 영상을 시작했다고 하셔서 모두에게 더 의미 있는 작업이었던 것 같습니다. 촬영 현장이 우선 너무 즐거웠어요. 또 결과물도 곡에 걸맞은 묘하고 미스터리 한 분위기가 담긴 것 같아서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뮤직비디오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해 보실 수 있어요.


카코포니 황홀한 실종 MV 
https://youtu.be/AFpvsF2oED8 






큰 단위의 앨범만 발매하다 보니, 싱글을 발매할 때의 마음가짐이 어때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글로 써내려가니 이번 싱글이 저에게 무슨 의미었는지 분명해지는 것 같아서 용기내어 써보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독자분들에게도 의미있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어요. 


날이 차가워요.

모두 몸과 마음 건강하기를 바라요.


언제나 감사합니다.


카코포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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