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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혜빈 Feb 24. 2024

우울과 우울을 흩는 것

우울

문득 정신을 차리니 학교 자습실 안이었다. 나는 가림막 없이 모둠 지어 붙은 책상에 앉아 있었고 내 주변엔 교복을 입은 또래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 중이었다. 그중엔 초중고 학창 시절을 지나며 봐왔던 얼굴들이 섞여 있었다. 그 얼굴들을 보며 저들이 그래왔듯 나 역시 지금까지 쭉 같은 자리에 있어 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시선을 떨어트리니 내 책상 위엔 수학 문제집이 있었다.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중요한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는 걸 곧 깨닫고 다른 학생들처럼 문제집의 페이지를 넘겼다. 한 장씩 빠르게 넘기는 동안 이제까지 채점한 흔적이 보였다. 대충 훑은 채점 결과가 나쁘지는 않았는데 그렇다고 좋지도 않았다. 체감상 70점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스치는 찜찜한 기분을 뒤로 한 채 다시 진도 나갈 페이지를 찾았다. 그곳은 전체 책의 1/3보다 조금 앞 되는 지점이었는데, 나는 그 페이지를 펼침과 동시에 더 이상 미리 푼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약게 중간중간 미리 풀어 놓은 문제들로 여유를 부릴 수 있었건만 흔적 하나 없이 깨끗한 수학 문제들을 마주하니 갑자기 마음이 답답해지면서 머리가 아득해졌다. 앞으로 이걸 언제, 어떻게 다 푸나 싶었다.


이제는 어찌할 수도 없이 닥쳐오는 대로 문제를 풀어야 하는 상태였다. 나는 다음날도 어김없이 자습실에 나와 수학 문제를 풀었고 내 뒤를 이어서 도착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교실에 있는 모두가 매일 각자 제 자리를 찾아 소리 없이 공부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바깥이 시끌시끌하더니 자습실 안으로 목소리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학생들 여러 명이 크게 떠들며 자습실에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뭔가 불만스러워 보였고 답답함을 토로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쥐 죽은 듯 조용한 자습실에 무리가 소란을 피우며 들이닥치는 것에 놀랐는데 그 소란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다른 학생들에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교실에 있는 학생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고 소름이 돋을 만큼 자기 공부에만 몰두했다.


아예 없는 일처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 나는 시끄럽게 얘기하는 무리를 저지할 생각은 그만두었다. 대신 저 아이들은 왜 저리 핏대를 세우며 얘기하는 걸까, 내 머릿 속엔 궁금증만 가득해졌다.


‘저렇게까지 얘기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 하고 속으로 읊조리자마자 주변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내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


“매일 문제를 풀어야 하는 이 시스템이 이해가 안 가니까 그러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갑자기 무언가를 이해한 듯 깨닫게 된 것 같았다.




* * *




새해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인상적인 꿈을 꿨다. 그 꿈은 너무도 생생했고, 생생했다는 이유만으로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먹어야 힘이 나는 거라며 첫 끼니를 억지로 입에 넣게 하는 엄마를 앞에 두고 꿈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밥을 씹으며 꿈을 묘사하는 순간 기억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간신히 흩어지는 꿈 자락을 붙잡아 드문드문 설명을 이어갔다. 내가 꿈속에서 무엇을 보았고 어떤 말을 들었는지 기억해 내느라 이야기가 잠시 끊기기도 했지만, 다행히 꿨던 대로 거의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 있었다. 결국 밥은 제대로 먹지도 않은 채 인상적인 꿈을 꿨다는 것과 그 꿈을 99% 가까이 기억한 것을 뿌듯해하며 엄마를 바라봤다.


내 이야기를 듣고 알쏭달쏭해하며 조금은 고민할 줄 알았는데 엄마는 예상외로 빠르고 간단하게 해몽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엄마에 의하면 내가 꾼 꿈은 인생의 비유였다. 매일 학교에 나가 문제를 푸는 건 다시 말해 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문제집은 나의 인생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꿈에서 본 무리의 소동은 이해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을 이해하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 해몽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실로 이 꿈을 꾸기 전까지 매일 삶의 이유에 대해 아프도록 곱씹었으니까. 엄마의 해몽을 듣는 동안 꿈속의 요소들과 현실 속 내 삶의 모든 것이 꿰맞춰지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꾼 꿈은 이제까지의 무의식이 잘 버무려진 경험 한 편이었다.


3 년 전 딱 이맘때,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20대 젊은 나이로 건강을 잃고 사회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현실은 암담했다. 잃은 건강을 찾을 방도도 없고 미래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사람을 쓸모로 이야기하는 걸 싫어하면서도 스스로가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은 정말이지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삶을 산다는 건 숨을 쉬는 것처럼 참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갑자기 숨 쉬는 법을 잊은 것처럼 고장이 난 것 같았다. 찾아오는 하루하루가 곤혹스러웠다. 알게 모르게 늘 무언가를 하면서 자신의 중요성을 찾았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면서 존재 이유를 잃어갔다.


이 잉여 같은 삶. 삶의 이유를 고민했다. 그 생각 뒤엔 우울이 따라왔다. ‘근심스럽고 답답함’은 내 마음에 깔린 상태였다. 가끔 몸집을 크게 불린 우울에 사로잡힌 때도 있었고 또 가끔은 우울이란 없는 것처럼 지낸 때도 있었지만 그 크기가 어떻든 간에 마음 한구석엔 언제나 우울이 자리를 차지했다.


“[돈. 직장. 관계. 명예. 건강…….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말해지곤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벌거벗은 넌 뭐야? 정말로 숨만 쉬는 상태에서, 넌 뭐야?”


내가 매일 마주한 질문.


“피투성이.”


그리고 대답.


대답과 동시에 느껴지는 아픔. 슬픔. 불안함. 괴로움. 두려움…….


어느덧 3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이니 마음은 단단해지고 이런 삶에도 익숙해졌다고 볼 만한데, 아니. 괜찮아졌나 싶다가도 하염없이 무너진다. 그럴수록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나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만을 깊이 깨닫게 된다. 다른 건 부차적이라고, 존재 자체가 중요한 거라고 굳게 믿고 쉽게 말하던 나였으나 내 존재 하나를 견딘다는 게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뼛속 깊이 알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속물은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앞서 나열한 어두운 감정 사이로 자꾸만 빛이 아른거림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피투성이라도 살라는 말. 먹기 싫은 밥을 걱정으로 챙겨주는 가족. 매일 누군가로부터 받는 배려. 함께 나누는 깊은 대화. 소소한 웃음. 우리집 고양이의 작은 귀여움. 동네 바다의 빛나는 아름다움. 불안을 잠재우는 약속. 괜찮다고 크게 안아주는 사랑이 자꾸만 문자 사이로 일렁이는 것 같다. 이해되지 않아서 발악이 나는 삶이라 해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왜 삶을 살아야 하는지 확답할 수 없지만 매일 속 이 작은 평범함이, 내 주변을 맴도는 다정함이, 사랑이 ‘생은 좋은 거야’하고 속삭이는 것만 같다.


나를 우울의 늪으로 끌어가곤 하는 [기준과 잣대들]. 아니라고 하면서 정작 가장 기대 온 것은 아니었는지. 이제, 이제야 그 기준과 잣대에서 벗어나 조금씩 벌거벗은 나를 마주하는 연습을 하는 것 같다. 보잘것없이 느껴지는 맨살의 나를 바라보고 점수, 쓸모, 사회적 성공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내가 나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연습을. 삶을 온전히 사는 방법을 훈련하는 것이다. 계속, 계속.


삶을 숨 쉬게 하는 건 점수 매길 수 없고, 무용해 보이며, 세상이 말하곤 하는 성공과는 상관없는 것들. 존재엔 어떤 계산이나 이유가 없다. 그저 사랑이 있을 뿐. 그 사랑이 나를 위로한다. 연약해 보이지만 힘을 준다. 모르겠지만 가도 괜찮을 것 같은 한 걸음의 용기를 준다.


나를 위해 여기 쓴다. 속절없이 무너질 때 기억할 수 있도록. 다시금 우울이 날 찾아올 때, 아무렇지 않게 우울을 흩어버릴 수 있도록.




물결이 있는 해질녘,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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