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잡문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언 Apr 08. 2024

랑(狼)의 캐치볼

"게이쉑들아"

랑(狼)의 사각 뿔테 안경알 위로 검은 글자들이 스크롤돼 내려간다.


'이 쉑 저번부터 썰 좀 치네 ㅋㅋ 썰 좀 더 풀어봐라 게이야'

'아니, 그래도 존예녀 고백을 쌍욕 박고 차다니. ㄹㅇ 고딩 때부터 상남자네'


마우스를 쥔 랑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간다. 마치 야구공을 쥔 듯한 모양새다. 랑이 요사이 커뮤니티에 쓴 글의 댓글을 읽을 때마다 반복하는 습관이기도 하다. 다만 아버지와 캐치볼을 하던 어린 시절과 달리, 요즘 랑이 던지는 건 야구공이 아닌 데이터 조각뭉치다. 공이 향하는 곳 또한 글러브가 아닌 모니터 속 이름 없는 익명의 관중석 어느 즈음이다. 랑의 투구 폼이 거칠고 과장될수록 관중석의 함성은 커졌다. 게이쉑. 믿고 있었다구우.


랑은 마우스를 그러쥔 오른손을 바라본다. 야구공을 쥐었을 때와 같은 이 단단함을 랑은 좋아한다. 다만 공을 되받아 던져줄 건너편의 부재에 대해 랑은 별 수 없이 가끔은 생각하게 된다. 모니터를 향해 던진 공은 함성을 불러 일으킬 뿐, 돌아오진 않았다. 마우스를 쥔 손에 스르륵 힘이 풀린다. 


랑은 세차게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불쾌한 생각이다. 지금 랑이 고민해야 할 문제는 다음 '썰'로 뭘 풀어야 하는지에 관해서다. 그때, 랑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안녕 랑아 나 혹시 기억해? 3학년 때 반장이던 김지수인데.. 졸업하고 거의 7년만인가? 잘 지냈지?'


랑은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기분에 주변을 둘러본다. 모니터의 조명에 어스름히 비친 사방의 벽들 뿐, 지켜보는 이는 없다. 랑의 심장은 답답하다 싶을만큼 세차게 뛰고 있었는데, 랑은 이 박동의 원인이 두려움과 설렘 중 어느 쪽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김지수. 랑의 '썰'의 주인공이자, 고등학생 시절 내내 랑의 시선 끝쪽에 머물던 아이였다. 포니테일을 찰랑거리며 달려가던 뒷모습이 참 예뻤던 아이. 혹시 본인에 대한 비밀스런 연재글을 읽어버린 걸까. 랑의 머릿속에 ‘정통법상 명예훼손’ 등의 단어가 스쳐갔지만 반사적인 두려움일 뿐, 현실성은 0에 수렴한다. 당연하게도 랑은 그녀에게 '쌍욕을 박은' 적이 없었고, 지수 또한 랑을 애달프개 붙잡은 바 없다. 애당초 랑과 지수는 욕설과 미련이 엇갈릴 만큼의 관계조차 된 적이 없다. 그래도, 그래도. 땀에 젖은 손가락이 스마트폰 액정에 미끄러지며 오타를 낸다. 랑은 사라졌을 '1' 표시를 생각하며 타이핑을 서두른다.


'어 지수야 오랜만이네. 당연히 기억하지 ! :)

ㅎㅎ 난 잘 지내. 왜 연락한거야???'


'아~ 딴 게 아니고 ㅎㅎ 우리 다음주 금요일에 강남역 자연가든에서 첫 동창회를 여는데 너도 왔으면 좋겠다 싶어서 연락했지~ 첫 동창회인데 사람 많으면 좋잖아? 다같이 회사욕도 좀 하고 ㅋㅋㅋ'


'아... 동창회 때문에 연락한거야? 난 몰랐네'


'엉엉! 너랑 몇 명은 졸업명부 번호가 없는 번호라더고 ㅋㅋㅋ 괜히 동창회장 같은 건 맡아갖고...ㅠ 여튼 올 수 있으면 꼭 와~ :)'


'엉 그래... 시간되면 갈게 ~'


휴대전화에서 고개를 뗀 랑의 시선이 모니터 옆 거울에 머문다. 오랫동안 자르지 않아 길어진 머리칼이 기름지게 번들거린다. 랑은 그녀 곁에서 서로 등짝을 때리며 웃던 같은 반 남자 아이들이 말쑥한 얼굴로 서로 명함을 주고 받는 모습을 떠올린다. 랑은 습관적으로 마우스 위에 손을 올린다. 마우스를 그러쥔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간다. 다시 관중들의 함성이 들린다. 키보드 위 랑의 손가락이 다시 춤춘다.


'게이쉑들아, 그때 찼던 고딩 동창이 방금 갠톡이 왔는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