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기반으로 비현실과 현실의 경계에서 작성하는 픽셔널(fictional) 에세이. 길었던 팬데믹의 끝자락에서 지난 시간의 촌극을 회상한다.
EP 01: 층간소음
팬데믹이 길어지면서 집 밖에서 뛰어놀아야 할 아이들이 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길어졌다. 아이들은 여전히 집 안에서 뛰었고, 집단이 거주하는 거대한 건물들은 쿵, 쿵하고 울렸다. 단순히 이 소음의 원인을 아이들에게 떠넘길 생각은 없다. 드르륵 하고 의자 끄는 소리, 새롭게 인테리어 공사를 위해 이곳저곳의 타일이 깨지는 소리, 무심코 세게 닫은 현관문에 식탁까지 살짝 전달되는 진동들, 원인 모를 타인의 소리들이 가장 사적인 공간으로 정체 없이 침범했다.
2020년 2월 귀국 이후 주변 사람들과의 안부인사는 주로 “코로나 조심해”, “코로나 끝나고 한 번 보자”, 뭐하고 지내냐는 물음에는 “집에 있지”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매일 쏟아지는 확진자, 확진자의 동선, 확진자의 직업, 확진자의 성별, 확진되어버린 순서, 거짓말이라도 했다간 대역죄인이 되어 뉴스 메인을 장식하며 털리고야 말 텐데, “이런 엄중한 시국에는” 집에 있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단순히 집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미덕을 챙겨갈 수 있다니, 기꺼이 지켜주리라.
집안에서 지속되는 일상에서 모든 계획들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니 방향을 찾지 못한 채 터널 속에 갇혀버린다. 코로나 블루라고 하는 건가,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것은 대체로 참 감사한 일이지만, 종착점이 없을 때는 답답하다. 답답하다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불필요할 정도로 가라앉는다. 끝날 것을 알지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나의 잘 못이 아니지만 나의 잘 못인 것만 같은, 하고 싶은 일, 보고 싶은 사람들, 향하고 싶은 장소, 많은 것들을 그저 기약 없이 미뤄야 하는 시간 속에서 그렇게 집에 있는다.
몸도 정신도 붙잡을 수 없이 가라앉을 때, 어디선가 또 소리가 들려온다. 쿵, 드르륵, 끽, 웅- 하는 진동소리. 가끔은 음악소리, 두두 두둥 탁, 뛰어가다가 멈췄나, 아니 쉽게 멈춰줄 리 없지. 그들 또한 위험한 바깥이 아닌 안전한 집을 택했을 뿐, 칸을 가로세로로 질러놓은 집에서 살아가기를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선택했을 뿐. 가끔은 참을 수 없을 때도 있지만, 당신들이 시끄러운 만큼이나 나 역시 누군가에게 소음이었을 거라 생각하며, 대체로는 또 그저 살아간다.
어느 날 기사를 하나 봤는데, 층간소음을 견디지 못하고 위층 손잡이에 분비물을 묻혀놓았다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분비물을 검사해보니 코로나 양성반응이 나왔다는 것이다. 층간소음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보았으니 나의 바이러스를 전파하겠다는 무자비한 마음은 무엇일까. 코로나 때문에 이 사달이 났으니 (코로나 전부터도 시끄러운 집이었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지만), 너는 코로나나 걸려버려라 하는 마음일까.
우선은 얼굴이 찌푸려지고, 코로나 바이러스였다는 사실에 살짝 헛웃음이 나오지만, 공감이 전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이전 오래된 아파트에 살았는데 매주 매일 같이 인테리어 공사를 하니 집이 부서져 내릴 것 같은 굉음에 아침부터 소리를 냅다 지르지 않으면 가족끼리도 대화가 안 될 지경이었다. 그때 자주 하던 말이 우리나라는 총기류 소지가 되면 큰일나겠다 싶었다. 말은 그렇게 험악하게 해도 근처 카페로 피신해있건 학교를 가거나 출근을 하거나 집 밖으로 도피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만약에 그 상황이 팬데믹 중이었다고 생각하면, 와, 견딜 수가 없었을 거다.
도시를 떠나 본가로 가면 비교적 모든 소음에서 벗어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옆집 개들이 짖는 소리 정도 말고는 온전하게 나의 공간은 나의 소리로 채우는 것이 가능한 곳이다. 하지만 도시로 돌아오면 어김없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집에서 거의 2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일상을 지속하게 될 것이라고는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