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ebbers Nov 08. 2021

성장은 지겹다

-방과 후 탭댄스-

버지니아 비치로 이사를 왔을 때, 우리 가족은 전에 살았던 아파트와는 훨씬 더 좋은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집은 넓고, 수영장도 있고, 또, 매일 아침에는 아파트 오피스에서 갓 구운 쿠키도 내놓았다 (나중에 학교를 다닐 때, 친구들과 같이 항상 아침마다 쿠키를 가져가기도 했다). 아파트 옆에는 놀이터가 있었고, 수영장 옆에는 바비큐를 굽는 공간이 따로 있어, 손님들을 데려올 때 삼겹살을 여기서 구웠었다. 나와 같은 어린애가 바라보았을 땐, 이 집만큼은 먼 거리를 여행해서 이사 온 보람을 느낄만한 집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집은 교회가 마련해준 것이었지만, 엄마 아빠의 월급에서 나가는 것이었다. 이것을 엄마 아빠는 모르셨고, 나중에는 월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집세를 못 이겨, 우리 가족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다. 그런 사실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 이사를 가는 것에 대해 그렇게까지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로 이사 온 집은 집세가 더 저렴했고, 그걸 나는 수영장의 부재로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뒤에는 작은 언덕 위에 놀이터가 있었다. 물론 수영장이나 다른 시설들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시설은 놀이터이다. 물론, 형형색색의 페인트가 칠해진 놀이터와 그저 철로만 만들어진 놀이터는 확연히 다르다. 이 집은 그래도 빨강과 노랑, 그리고 초록색이 적절하게 칠해진 놀이터를 가지고 있어, 나름 만족스러웠다. 이렇게 나는 이 집에서 나머지의 미국 생활을 보냈다. 




어렸던 나에겐 집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었다. 나는 새로운 환경에 또 적응을 해야 한다는 것에 큰 부담감을 느꼈다. 분명 나는 친구가 있는데, 없어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마저 좋았던 것은, 부모님이 이제 나에게 용돈이란 걸 주신다고 했다. 돈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해 배우기 위해서라도, 일주일에 25 센트씩 주신다고 하셨다. 물론, 저금통과 같이 말이다. 나는 일주일마다 오는 저금통 돼지의 밥을 성실하게 주었다. 그리고 3개월의 노력으로 얻은 그 수확은, 근처 스타벅스에서 자바칩 프라푸치노를 먹는 데에 쓰였다. 물론 그것조차도 큰언니와 나눠먹은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부모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돈을 먹는 데에 쓰는 습관만 길렀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국립학교로, 전에 다녔던 기독교 학교와는 다르게, 시설은 좀 더 낡았고, 아이들이 더 많았으며, 겨울에는 학교가 추웠다. 그래도 나는 금방 적응했다. 놀랍게도, 나는 그 학교에서 반장 역할을 맡은 적도 있었다. 지금도 그렇고, 그때도 그렇고, 나는 성격은 내향적이지만, 생존을 위해 선택적으로 외향적인 성격을 가졌고, 그 덕분에 많은 친구들을 고루고루 사귀었다. 숙제도 빠지지 않고 제출하고 성적도 좋아서, 선생님은 전학 온 지 한 달도 안된 나를 반장자리에 앉히셨다. 반장의 입무는 꽤 할 일이 많았다. 선생님의 보조 역할로, 수업을 준비하시는 데에 옆에서 도왔고, 국기에 대한 경례 (Pledge of Allegiance)를 할 때는 앞으로 세우셨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제일 좋아했던 임무는 'Write up'이었다. 반장으로서, 나는 자습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말을 안 듣거나 시끄러운 친구가 있으면, 칠판에 이름을 적어야 했다. 칠판에 이름을 적힌 아이는 나중에 선생님으로부터 청소 같은 여러 임무를 맡게 되었다. 물론 나는 반 아이들 전체와 친하게 지냈기에, 많이 적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 번은, 권력남용을 해야만 하는 날들도 있었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에는, 미국에 'Bratz Doll'이라는 인형들이 유행했다. 바비인형과는 다르게, 이 인형들은 좀 더 화장이 진했고, 옷도 화려했다. 바비와는 다르게, 이 인형들은 특별히 직업이 없고, 그저 스타일리시하고 예쁜 미국의 십 대를 그대로 베낀 인형들이었다. 이 당시에 내 친구들은 모두 이 인형 하나씩은 갖고 있었다. 물론, 나만 빼고 말이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친구들과 같이 놀면, 공유하며 놀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와 평소에 같이 놀던 애들 세명이 내가 그 인형 하나가 없다는 이유로 나와 같이 놀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많이 슬펐지만, 나중에는 그저 화가 났다. 그저 인형 하나로 무리에 안 끼워준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반장으로서, 모범적인 면을 잠시 내려놓고, 그 세명의 이름들을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칠판에 적었다. 혹시라도 헷갈릴까 봐, 나는 이름만 적으면 될 것을 성까지 같이 적었다. 그 아이들은 매일 학교에서 선생님을 도와야 했고, 나는 옆에서 그것을 바라보며, 복수의 고소함과 권력의 맛을 처음 맛본 것 같다. 


학교는 성적도 좋고 품행도 좋은 나에게 더 많은 것을 바랐다. 그래서 나의 엄마를 불러서 내가 방과 후 수업을 듣는 것이 어떻겠냐고 설득했다. 처음에 엄마와 나는 둘 다 부담스러웠지만, 방과 후 수업을 들으면 아이의 상상력과 경험이 더 풍부해진다는 말을 들은 엄마는, 나를 방과 후 수업에 보내기로 맘을 먹으셨다. 방과 후 수업이라고 해서,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나머지 공부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예술이나 체육활동을 배우는 수업들이었다. 나는 처음에 축구나 연기수업을 들으려 했지만, 그 수업들은 인기가 너무 많아 자리가 없고, 엄마의 시간대에도 맞질 않아서, 나는 탭댄스 수업을 듣기로 했다. 그러나, 그 수업을 듣기 위해 필요한 준비물 하나가 제일 먼저 다가온 어려운 관문이었다. 그 준비물은 다름 아닌, 탭슈즈였다. 당연한 것이었다. 탭댄스 수업에 탭슈즈는 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엄마와 내가 백화점과 상점들을 돌아다닌 결과, 탭슈즈는 하나에 300 불이었다. 우리 가족 한 달 식비보다 더 많이 나온 금액이었다. 벌써부터 부담스러운 수업에 나는 엄마가 싸인만 해주시면 수업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설득했다. 그렇지만, 엄마는 포기하시지 않으셨고, 그다음 날 나는 탭슈즈를 들고 수업을 들었다. 


엄마는 탭슈즈를 사실수는 없으셨다. 그렇다고 나에게 방과 후 수업을 포기하라고 말하기도 싫으셨다. 그래서 엄마는 나의 하나 있는 검정 구두에 철로 된 자석을 글루건으로 붙이셨다. 그리고 교회 갈 때에만 신는 그 구두는, 그다음 날 탭슈즈로 변신했다. 실제로 구두를 신고 탭댄스 수업을 들었던 나는, 나와 다른 애들의 소리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야 준비물이 생긴 나는, 처음엔 스트레칭과 기본 동작만 배우는 수업이 재밌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학교 축제가 다가오자, 선생님은 급하게 본격적으로 우리를 가르치셨고, 몇 가지 동작들을 배운 나는, 처음으로 댄스가 맘에 들었다. 학교 축제에서 탭댄스를 선보였던 나와 내 친구들은 엉망인 퍼포먼스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이것은 훗날 내가 한국에 있을 당시에 초등학교 축제에서 우리 반이 재즈댄스를 선보일 때, 맨 앞에 설 수 있게 도와주었던 경력이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성장은 지겹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