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와 욱일기 ~ 한국사의 이해를 위한 메이지 열전
첫 시간의 주인공, 요시다 쇼인은 에도막부 시절이던 1830년, 지금의 야마구치 현에 있던 조슈번의 하급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참고로 조선 철종임금이 31년생이니 거진 동년배인 셈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유학을 배웠는데, 대단한 천재였는지 12살에 조슈번의 번주 앞에서 강의를 하고 19세에는 번 공립서당의 사범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엘리트 코스를 밟아 무난한 학자가 되었을 것 같은 그였지만, 풍운아 같은 삶을 살다가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막부에 의해 참수당하면서 짧은 삶을 끝내고 만다.
그러나 짧은 삶과 달리 존재감은 엄청난데, 우리 국사교과서에서는 그를 메이지 유신세력의 스승이자 정한론의 시초라고 가르치고 있다.
메이지 시대를 자랑스러워하는 일본에서도(특히 우익계) 인기는 대단하여 고 아베 신조 총리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그를 꼽기도 하였다(야마구치 출신인 아베는 평소부터 자신을 조슈 사무라이의 후예로 이미지메이킹하길 좋아했다).
과연 무엇이 그를 시대의 풍운아로 만든 것일까?
그리고 250년간 이어져온 막부를 한순간에 날려버리고 일본을 아시아 유일의 제국주의 국가로 만든 것일까?
그 답은 ‘흑선’에 있다.
시계를 잠시 되돌려 1598년, 실권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일본군은 본국으로 퇴각한다.
그 뒤 후계자 문제를 두고 온 나라가 반으로 갈라져 싸운 뒤 세키가하라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막부를 세우며 오랜 전란의 시기가 끝나게 된다.
비록 싸우기는 했어도 서로 간의 교류가 필요했던 조선과 일본은 각자 조선통신사와 동래도호부를 통해 사신을 왕래하고 부산왜관을 통해 교역하기로 한다.
그러나 원래부터 나머지 세계와의 교역은 중국에 맡겨버렸고, 또 19세기 세도정치 하에서 일본과의 교역도 거의 중단 돼버리면서, 조선은 바깥의 세계와는 철저히 고립된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반면 이미 왜란 이전 전국시대 때부터 서로 조총으로 싸워온 만큼 교역이 생존을 위해 절박했던 일본의 세계무역은 에도막부 초기에도 별 탈 없이 이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일본 역시 교역의 위험성을 깨닫는 사건이 있었으니, 1637년 시마바라의 변이다.
왜란 때 선봉장으로 침략해 왔던 고니시 유키나가도 기독교인이었을 만큼 이쯤 되면 기독교는 일본사회에 널리 퍼져있었고, 영주의 세금수탈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기독교의 깃발아래 합쳐 대항하면서 뜨거운 맛을 본 에도막부 역시 ‘후미에(예수그림 밟기)’로 대표되는 강력한 박해정책으로 돌아서고 기존 서양국가들과의 교역을 대부분 차단하게 되니, 이른바 쇄국정책이다.
다만 나머지 국가들과 달리 포교에는 관심 없고 교역만 하겠다고 맹세했던 네덜란드를 위해서는 나가사키 밖에 인공섬을 하나 매립해 ‘데지마’라고 이름 붙여 이곳 한정으로 교역을 허락했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인들은 귀빈으로 대접받으며 정기적으로 쇼군에게 국제정세요약과 서양문물을 진상하였고, 이는 에도막부가 19세기 격동의 시대에 가장 선진적인 대응을 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된다.
또한 네덜란드 문물에 대해 연구하는 ‘난학’ 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네덜란드어를 배워 17세기부터 서양서적을 번역해 왔고, 막부에서도 이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교를 운영할 정도였다.
난학 파는 일본개항 이후 서구문물이 급격히 쏟아져 들어오면서 네덜란드어를 지침 삼아 다른 외국어들을 빠르게 습득할 수 있었고, 이는 막부말의 외교와 기술흡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일본이 서구문물을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던 데는 분명 난학의 도움이 컸을 것이다.
그렇게 세계정세에 민감하게 귀 기울이고 있던 에도막부에 거대한 충격이 닥치니, 바로 청나라의 충격적인 아편전쟁(1840~42) 패배소식이었다.
차와 도자기로 인한 무역적자를 메우려 한 영국인들의 인도산 아편판매에 분노한 청 정부는 청백리 임칙서를 호광총독으로 파견하였고, 그는 즉각 항구에서 아편 전량을 몰수해 폐기처분해 버렸다. 너무도 당연한 주권행사였으나 분노한 영국의회에서는 6표의 차이로 전쟁이 결의되어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개전결과는 허무하게도 영국군이 거의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채로 상하이, 난징을 함락해 청의 물류망을 완전히 막아버리며 2년 만에 사실상 항복으로 끝나게 된다. 그 결과 중국사 최초 영토의 할양(홍콩)과 함께 5개 항구의 추가개항, 막대한 전쟁배상금 지불이라는 굴욕적인 조약이 체결되니 이것이 난징조약이다.
이 전까지 동양국가들에겐 말할 것도 없고 서양에게도 청나라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 나폴레옹조차 중국을 가리켜 잠자는 사자를 깨우지 말라고 할 정도였으니.
그러나 껍질을 벗겨 알맹이가 종이호랑이였음을 확인한 서양국가들은 이후 침탈을 본격화하게 되고 이것이 중국 몰락의 신호탄이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국가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야말로 아Q식 합리화 일색이었던 청나라와 아예 무덤덤했던 조선과 달리 일본은 그 메시지를 정확히 파악하였다. 앞으로 서양국가들이 개항과 교역을 요구해 올 때는 총포도 함께 따라올 것이라는 점을.
그야말로 일본사회는 들쑤신 벌집이 되었고, 요시다 쇼인도 20세가 되던 때 전국을 떠돌며 새로운 길을 찾아가기로 결심했고 데지마, 에도 등을 방문하게 된다. 심지어 러시아를 경계하여 도호쿠 지역을 방문할 때에는 막부의 공식 통행허가증 발급을 기다리지 못하고 무단탈번까지 감행했다고 한다.
소속번이 엄격히 강제되던 사무라이에게 탈번은 사형감이었지만, 번주는 그의 천재성을 아깝게 여겨 견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를 사면해 주고 오히려 10년간의 국내유학까지 허가해주었다고 한다.
이 시기 쇼인의 견문과 사상은 크게 넓어졌고, 이는 그가 유신지사들의 스승으로써 성장하는 밑거름이 된다.
쇼인이 23세가 되던 1853년, 결국 모두가 우려하던 사건이 벌어진다. 도쿄 앞바다 우라가만에 검은 배들이 나타난 것이다.
생김새 그대로 ‘흑선’이라고 불렸던 이 배들은 미국의 올리버 페리 제독이 교역과 개항을 요구하기 위해 끌고 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막부도 시간을 끌어보며 어떻게든 저항해보려 하였으나 페리제독의 함대가 해안포대 사정거리 밖에서 만을 봉쇄해 버리자 물류가 막혀버린 막부는 아편전쟁에서의 청나라처럼 허무하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설마 그래도 막부가…?’하고 지켜보던 수많은 백성들이 막부에 실망하고 등을 돌리면서 막부체제 붕괴의 본격적인 신호탄이 된다.
쇼인 역시 에도막부의 무력함에 깊이 실망하였으나 역시 거기서 끝나지는 않았다.
그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만이 답이라고 생각하고 미국유학을 하기 위해 친구와 함께 정박해 있던 흑선에 도항을 감행한다.
가까스로 도항에 성공해 페리제독을 만나 유학을 요청하였으나 당연히 페리제독은 이를 거절했고, 낙담한 쇼인은 돌아가 막부에 자수해 14개월간의 감옥생활을 한다 (같이 도항한 친구는 옥사).
1855년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그의 주변에 명성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가르침을 청하기 시작한다.
그는 처음에는 이들을 개인과외식으로 가르쳤으나 규모가 커짐에 따라 1857년 정식불법사학(?)을 개설하니, 이것이 조슈번 유신지사들의 요람이라 불리는 쇼가손주쿠(松下村塾)이다.
쇼카손주쿠가 기존의 교육기관들과 다른 것은 신분에 관계없이 실력만 있다면 제자로 받아들여 가르쳤다는 점이다.
요즘말로 보통교육인 셈인데, 의외로 이 교육의 수혜자는 농민이 아닌 하급사무라이들이었다.
당시 에도막부사회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로써, 사무라이들 역시 오랜 평화 속에서 쓸모없어진 군인역할보다는 관료로써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교육받았다.
그러나 상상과 달리 하급사무라이의 삶은 1. 에도막부의 견제로 빈곤해진 번에서 2. 원래도 많지 않은 봉급의 잡무를 3. 농상업의 부업도 금지된 채로 여기에만 의지해서 사느라 항상 가난에 허덕이고 앞뒤로 꽉 막힌, 차라리 서민이 부러울 지경의 삶이었다.
이들은 쇼카손주쿠의 상호 간 자유로운 토의를 통한 교육에서 탈출구를 찾았고, 쇼인에게 배운 국제정세에 대한 지식과 존황양이 이념이 자신들을 억압하던 막부체제에 대한 불만과 버무려지며 도막파의 주역으로 태어나게 된다.
주요 인물로는 다카스기 신사쿠(신식군대 키헤이타이를 조직, 보신전쟁 승리에 공헌), 이토 히로부미(메이지 내각 초대총리, 초대 조선통감), 야마가타 아리토모(3대 총리, 군국주의의 아버지) 등이 있다.
1858년 멍청한 쇼군을 대신해 막부의 최고실권자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가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그 내용은 당초 요구사항이던 5개 항구 개항+무역자유화에 미국의 영사 재판권은 더하고 관세자주권은 삭제당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즉 미일수호통상조약은 막부-서양 간 최초의 조약이자 최초의 불평등 조약으로써 이후 우리나라도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을 통해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된다.
이와 같은 불평등조약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 흑선의 위협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해당내용을 국제법 위에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이 역시 강화도 조약에서 그대로, 아니 곱빼기로 적용된다).
이후 다른 국가들과 비슷한 내용의 조약이 체결되고 훗날의 메이지 정부 초반전은 이로 인한 재정적자+산업파괴(관세조정이 안되니)에 외국인 치외법권(직접재판을 못하니) 이슈에 내내 골골대게 된다.
그러나 이는 훗날의 이야기이고, 이 시점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었던 것은 이이 나오스케가 조약체결과정에서 천황을 패싱 했다는 점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막부시절 내내 천황은 실권 없는 허수아비가 아니었는가?
맞다. 그러나 어쨌든 명목상 쇼군은 ‘천황에 의해 임명받은 정이대장군’이다. 전두환조차 사후승인일지언정 참모총장 연행에 대통령 싸인을 필요로 했지 않은가.
중대한 외교문제를 상의하는 ‘척’도 없이 패싱 해버린 나오스케에게 당시 고메이 천황은 극노하였고, 여기에 주변 존황양이파들의 꼬드김에 덴노는 번 중 전통적인 존황양이파이던 미토번에 불만을 담은 밀칙을 내리니 이를 ‘무오년의 밀칙’이라 한다.
그러나 이번엔 허수아비 천황이 막부를 패싱하고 번에게 다이렉트로 명령을 전한 셈이니 막부 또한 심기가 불편해짐은 자명한 것.
이를 계기로 천황과 막부의 오랜 공생에 깊은 감정의 골이 파이게 된다.
막부와 천황의 갈등은 개항을 비롯, 막부에 대한 불만들을 거름 삼아 점차 ‘막부를 때려 엎자’는 도막파의 형태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에 이이 나오스케는 더 이상 사태를 좌시할 수 없다 판단, 100명에 이르는 존황양이파 지사를 잡아들여 처단해 버리는데 이를 1859년의 안세이 대옥이라 한다.
요시다 쇼인도 지사들 중 한 인물을 만났다는 제보가 있어 참고인 조사차 관부로 압송된다.
당초 목적대로 그와 만나 무슨 얘기를 했는지 물어보려고 했던 막부 조사관.
그런데 쇼인에게서 나온 이야기는 난데없는 막부 고관의 암살계획이었다!
내막인즉슨, 쇼인 역시 천황의 허락을 받지 않은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
이에 언젠가 제자들과의 사석에서 막부의 고관을 납치하여 조약의 해지를 요구하고 수틀리면 본보기를 보여주자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러니 말하지 않았으면 아무도 몰랐을 텐데 쇼인은 이를 술술 불어버렸고, 놀란 막부는 쇼인 역시 처형하게 되는데 이것이 안세이 대옥의 마지막 처형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유신지사들의 스승은 향년 30세로 짧은 삶을 마치게 된다.
여담이지만 이듬해, 이이 나오스케 역시 안세이 대옥에 불만을 품은 존황양이파 사무라이들에 의해 에도성 사쿠라다 문 앞에서 암살당하며 정국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지만, 정한론이 그의 작품인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 때도 보이듯 조선은 대륙진출의 교두보라는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와 동시에 조선침략 자체가 지금의 북풍처럼 내부결속용 단골 레퍼토리였다.
아편전쟁과 흑선사건을 통해 서구 제국주의의 위협을 뼈저리게 느낀 그로서는 마찬가지로 조선을 조국 일본이 근대화하기 위한 제물로 삼고 싶었을 것이다.
저서 『유수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조선을 옛날과 마찬가지로 공납하도록 촉구하고, 북으로는 만주의 땅을 분할하여 빼앗고, 남으로는 대만, 필리핀의 여러 섬을 우리 수중에 넣어 점차 진취의 기세를 보여야만 할 것이다.”
여기서 ‘조선을 옛날과 마찬가지로 공납하도록 촉구’ 부분이 바로 고대 일본의 진구황후가 바다를 건너와 신라를 정벌하고 조공을 받았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뜻한다.
쇼인이 얼마나 정한론에 진심이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허언을 기어코 현실에 구현해 내며 동아시아의 역사를 흔들게 된다.
정리하자면, 요시다 쇼인은 메이지 유신의 두 주역번(죠슈, 사쓰마) 중 한쪽의 지사들을 키워낸 스승임과 동시에
정한론을 통해 향후 메이지 정부의 행보에 크나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더불어 혼란스러운 정국을 맞아 전국을 유랑하고 견문을 넓혀 나름의 대안을 제시한 모습은 그 시절 뜻있는 사무라이들의 표본 같은 삶이었다.
다음 시간에는 유신의 다른 한축인 사쓰마의 대표인물인 동시에 또 다른 ‘정한론’ 주창자로 유명한 ‘사이고 다카모리’의 삶을 통해 막부의 붕괴와 메이지 유신의 과정을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