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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챠챠쟝 Mar 11. 2024

3. 이토 히로부미(상): 메이지 정부의 출발

국화와 욱일기 ~ 한국사의 이해를 위한 메이지 열전

하얼빈의 노신사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이토 히로부미는 목숨을 잃었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의 하얼빈 역.

기차에서 내린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안중근 의사가 세발의 권총탄을 발사하였다.

총탄은 급소를 꿰뚫었고, 이토는 응급처치를 위해 열차 내로 옮겨졌으나 이내 눈을 감았다.


그보다 두달 전인 1909년 8월 19일, 이토는 야마가타 시에서 열린 연설회에서 한일관계에 대한 의견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제는 실로 협동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며, 자진하여 한 가족이 되어야 한다
(今や方に協同的に進まんとする境遇となり、進んで一家たらんとせり)"

한일합병에 대한 의지를 공식적으로 밝힌 순간이었다.

이토는 한일합병을 위해서는 러시아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고 하얼빈행은 바로 러시아의 고위관료를 만나 이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기념사진. 가운데 앉은 노신사가 이토 히로부미이다.

아마 한국인에게 '이토 히로부미가 누구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위의 장면을 대답할 것이다.

조금 더 역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그가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하였으며 그로 인해 부임한 초대 조선통감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그가 일본 헌법과 의회정치 아버지이며 초대를 비롯해 4차에 걸쳐 내각을 이끈 총리대신이었음은 모른다.

지금도 일본 국회 정문 홀에 흉상이 있는 세 사람 중 한사람이다.

그 만큼 한일 양국에서 인식차가 큰 역사인물도 드물 것이다.


과연 이토 히로부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왜 메이지 정부의 톱 자리를 물려받아 헌법을 완성했을까?

그는 왜 노년에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하였을까?

그는 왜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했을까?

이제 그의 생애를 따라 근대 일본과 조선이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하는, 우리에게 조금은 가슴아픈 역사 속으로 들어가보자.


쇼카손주쿠의 기린아

1863년, 22살 시절의 하급무사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죠슈번에서 태어났다. 

원래 메이지유신이 하급 사무라이들이 주도해서 일어난 것이라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그 중에서도 각별하다. 

그의 아버지는 무려 소작농이었기 때문이다.

추후 근면함을 인정받아 추겐(中間, 최하급 무사 아시가루와 평민 사이의 세습제 신분으로 상급 무사의 신변을 돌보고 잡일을 담당) 신분을 얻었지만 여전히 평민에 가까웠다.

훗날 등장할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이 신분이었다 하니, 정말 19세기 말의 일본은 하급 사무라이들의 시대였나보다.     


이토 히로부미는 15세 때 죠슈번의 말단 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다.

이 때 상관이 공부해보길 추천한 곳이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였다.

그렇게 16세 때 이토 히로부미도 요시다 쇼인의 제자로써 입문하게 되지만 정작 기라성같은 제자들 사이에서 큰 주목은 받지 못한 듯 하다.

“능력은 없는 데 성격이 좋아서 주선자 역할은 잘 해낼 것.”이란 게 그에 대한 쇼인의 평이었는데 과연 정확한 평이었을까?

오히려 이토 히로부미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다른 쇼인의 제자인 다카스기 신사쿠와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이 중 다카스기는 사이고편에도 나왔던 키헤이타이의 창설자이고 이노우에는 훗날 이토 히로부미가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 그의 오른팔로 불리며 일본의 법과 제도를 만들었던 사람이니 젊은 날의 그에게는 정말 소중한 인연이었다.     

조슈 파이브 시절. 가운데가 이토 히로부미, 오른쪽 끝이 이노우에 가오루

1편에서 보았듯, 요시다 쇼인의 죽음을 전후해 죠슈번은 전국적인 양이지사들의 중심지로써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번주 역시 양이에 진심이었는지 ‘서양을 이기기 위해서는 서양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 아래 죠슈번의 똘똘한 젊은이 다섯을 골라 영국에 유학을 보내게 되는데, 이들을 ‘죠슈 파이브’라고 불렀다.

이토 히로부미 역시 이 죠슈 파이브의 일원으로써 영국까지의 여정을 떠나게 되었고 이 여정은 인생의 향방을 바꿔놓게 된다.

영국에서는 거대한 공장과 증기기관, 건축물 앞에서 현대문명의 힘을 절감하고 그의 사상도 쇄국파에서 개항파로 돌아서게 된다.

그 후 칼리지 오브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에 입학해 영어와 화학을 공부하게 되는데 이 때 배운 영어실력은 그가 평생 동안 서구문명을 배우고 서양과 교섭하는데 든든한 밑천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죠슈 파이브의 영국생활은 불행히도 반년만에 끝나게 되는데, 사이고 편에서 보았던 시모노세키 전쟁이 터졌기 때문이다.

나라(=번)가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어찌 한가하게 있을쏜가.

이토는 즉시 귀국을 결심해 일본행 배에 오르지만 이미 이토가 죠슈에 도착했을 땐 전쟁이 영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버린 상황.

그는 마침 배운 영어실력을 십분 활용해 영국과의 중재회의에 통역으로 참여하였다.

이 때 수완을 발휘해 죠슈가 부담해야 할 배상금을 막부에게 떠넘기는 데 성공했으니 죠슈번으로써도 실로 시기적절한 인사였다 할 수 있겠다.     


앞서 사이고 편에서, 시모노세키 전쟁 이후 분노한 막부의 1차 죠슈정벌로 양이파가 쫓겨났다가 키헤이타이의 군사력에 힘입어 정권을 재탈환한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키헤이타이의 지도자가 누구인가? 이토의 쇼카손주쿠 생활 당시 절친이었던 다카스기 신사쿠 아닌가.

사실 당시 사람들이 양이파의 승률을 높게 보지 않았지만 의리를 중시했던 이토는 다카스기의 요청을 받자마자 양이파에 합류하였고 쿠데타를 성공시킴으로써 죠슈번 정치의 실세가 된다.

이후 막부의 2차 죠슈정벌 실패에 뒤이은 보신전쟁으로 막부가 멸망하고 메이지 시대가 시작되면서 죠슈번과 사쓰마번이 일본 전체의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바야흐로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인생도 날개를 펴려 하고 있었다.     


이와쿠라 사절단 – 근대와의 조우와 좌절     

이와쿠라 사절단. 왼쪽부터 기도 다카요시, 야마구치 마스카, 이와쿠라 도모미,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메이지 정부에서 영어를 (그나마) 능숙하게 할 줄 아는 이토의 존재는 굉장히 귀했다.

1868년, 이토는 26세의 나이로 효고현 지사로써 첫 요직을 맡게 된다.

당시 효고현은 영역 자체의 넓이는 넓지 않지만 고베와 효고의 개항장이 포함되어 있어 항상 외국인들과 접촉해야 하며 외교적 판단이 필요한 중요한 자리였다.     


보신전쟁 종결 직후인 1870년, 이토는 경제제도와 화폐제도를 조사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첫 ‘해외특파원’ 일정을 시작한다.

귀국 후 그는 개혁의 원동력으로써 재정과 회계를 관리할 수 있는 대장성의 역할확대를 위한 개혁안을 제출한다.

이와 함께 출장기간동안 이토는 워싱턴에서 미국의 헌법제정에 관한 책들을 구입하여 헌법제정과정을 연구했다.

그 과정에서 ‘헌법으로써 국가의 형태를 만들어간다’는 공화제의 개념과 그 어려움을 깨달으며 개략적인 향후 일본의 근대화 방향을 세웠다.

이 때의 공부는 향후 일본의 헌법제정과정에서 이토가 다른 실력자들의 ‘뜬구름 잡는’ 소리들을 물리치고 실질적인 헌법의 제정자로써 주도권을 쥘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1871년, 요코하마항에서 이와쿠라 사절단을 배웅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듬해인 1871년,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를 비롯한 정부의 핵심멤버들이 모두 참여한 이와쿠라 사절단이 출범할 때 이토 역시 외교통으로써 멤버에 합류한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최우선 목적은 기존 막부가 서구열강들과 체결해놓은 불평등조약의 개정이었다.

대표적으로는 관세자주권–수입품에 붙이는 관세를 자주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과 치외법권(영사재판권)-국내에서 외국인이 저지른 범죄는 해당국 영사가 재판한다는 권한이 있다.

관세자주권은 근대화를 위한 재원확충을 위해서, 치외법권은 개항에 따른 민심의 악화를 막기 위해서 메이지 정부로서도 반드시 개정이 필요한 항목들이었다.     

이와쿠라 사절단을 맞이하는 미국관리들. 그러나 실상은 환영파티 뿐 실무적 진전은 전무했다

그러나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정은 첫 방문국인 미국에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워싱턴에 도착한 사절단은 국무장관을 만나 조약개정 교섭을 시작하려 하였으나 국무장관에게 전권위임장을 안가져왔음을 지적받자 오오쿠보와 이토가 다시 5개월에 걸쳐 일본까지 돌아가 위임장을 가지고 돌아오는 해프닝으로 시작했으나 그들이 돌아오자마자 조약개정 교섭은 중단되어버리고 만다.

또 이 과정에서 기존 열강들과의 조약에 들어있던 ‘최혜국 대우’ 조항에 따라 어느 한 나라와 조약과정에서 한 양보가 다른 나라에도 자동으로 적용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이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등 다른 서양열강들도 방문하게 되지만 어느 나라에서나 조약개정에 대한 반응은 냉담했고 오로지 자신들이 더 많은 것을 얻어내는 데만 혈안이 되어있었다.

훗날 우리나라의 이준열사를 비롯한 특사들이 헤이그에 가 열강들 사이에서 겪게 될 설움을 이들도 약소국 시절 똑같이 겪은 셈이다.

노회한 정치가 비스마르크의 한마디는 일본의 지도자들이 기존 영국/프랑스 대신 프러시아 모델을 따르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비스마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국제적으로 만국공법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큰 나라끼리나 통하는 얘기다. 

작은 나라는 큰 나라에게 당하기 마련이다. 

작은 나라가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실력을 길러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실력을 기르는 데 있다.’

의기소침해 있던 이들은 비스마르크의 이 말에 깊은 감명을 받고 이후 당장의 조약개정보다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화에 먼저 집중하기로 방향을 전환한다.     

사절단의 대표인 이와쿠라 도모미의 여정 말미의 모습. 조정귀족 출신이던 그의 첫 모습과 비교해보자

비록 조약개정에서는 쓴맛을 보았지만 이와쿠라 사절단의 진정한 의의는 정부지도자들이 단체로 당시 열강의 발전된 문물을 직접 보고 느끼고 왔다는데 있다.

사실 이토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 인물들의 해외접촉 경험은 개항장에서의 외국인들과의 접촉이 다였기에 어느 정도 양이의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첫 두 국가인 미국과 영국에서 발전된 산업시설과 공장, 철도, 항구를 목도하면서 일행 모두는 완전한 개화파로 바뀌었고 세 번째 방문국인 프랑스부터는 일본식 복장을 버리고 서양식 양복과 두발을 하고 나머지 일정을 마쳤다고 한다.

조선의 갑오개혁이나 중국의 양무운동이 기득권의 반발에 떠밀려 흐지부지 된 것을 떠올려보면 유일하게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요인 중 큰 비중이 이 이와쿠라 사절단이라는 ‘지도층의 단체개화’에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1873년 9월, 이토가 이와쿠라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일본에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고가 정한론 정변으로 사임하면서 본격적인 오오쿠보 내각이 시작된다.

본래 죠슈와 사쓰마로 출신도 다르고 개혁에 대한 견해도 달라 사이가 좋지만은 않았던 이토와 오오쿠보였지만 사절단 기간내내 둘은 서로에게 깊은 호감을 갖게되었고, 이후 이토는 오오쿠보 내각에서 중책을 맡게된다.     


대만정벌과 윤요호사건 - 메이지 정부의 한계     


정한론 정변으로 인한 사이고 다카모리 일파의 사직은 권력을 오오쿠보에게 몰아줌으로써 정국을 안정시켰지만, 인망을 얻고있던 사이고의 공백으로 인해 군을 동요하게 만들었다.

이는 조슈와 사쓰마번의 군사력에 의지해 일어섰으며, 아직 자체적인 군사력이 미비한 메이지 정부에게 큰 약점이 되었다.

그 약점이 드러난 한 예가 대만정벌 사건이다.     

대만정벌 중 가장 치열했던 수문전투를 그린 일본의 판화

1871년 11월, 류큐(현 오키나와) 어민 54명이 타이완에 표류하여 원주민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류큐는 명목상 독립왕국이기는 했지만 앞서 사이고편에서 언급했듯 이전부터 사쓰마의 실효지배를 받으며 일본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이에 메이지 정부는 이참에 청국으로부터 류큐를 일본의 영토로써 국경을 획정하고자 한다.

이에 1874년 2월, 일본은 청국에 책임을 추궁하는 동시에 나가사키의 사이고 쓰구미치 육군중장(다카모리의 동생)에게 1,000명의 병력을 준비시킨다.


그러나 당시 대만 또한 청국에게는 본토 쪽 해안가 일부를 제외한 산지는 사나운 원주민들이 사는 치외법권이었고 그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본국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며 발뺌하였다.

그러자 곤란해진 것은 메이지 정부였다.

여기서 자칫 강경하게 원주민을 정벌하겠답시고 나섰다가는 청국과의 전쟁으로 확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영국과 미국 역시 일본의 무리한 타이완 출병에 항의를 보내왔다.

대만정벌 사령관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생, 사이고 쓰구미치

이에 내각의 톱인 오쿠보가 직접 나가사키로 가 쓰구미치에게 출병연기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여기서, 초유의 사건이 벌어진다.

쓰구미치가 강제로 병사들을 해산시켰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며 1,000명의 병사를 그대로 군함에 태워 타이완으로 출발해버린 것이다!

내각의 다른 톱인 기도 다카요시는 여기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사표까지 냈지만 이미 출발해버린 부대를 어쩌겠는가.

정부는 이들의 출발을 사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타이완에 출병한 일본군은 4개월만인 1874년 6월 경 원주민 토벌을 거의 종료했지만 원주민의 거센 저항과 풍토병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10월 경 청국과 담판이 타결되어 타이완 출병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고 50만냥의 배상금을 받았지만 이는 일본의 출병비용에는 턱없이 모자란 액수로써 일본은 청국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체면을 세운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부산 초량왜관의 풍경

그러나 말썽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으니, 이듬해인 1875년에는 조선과 문제가 터진다. 

이보다 앞서 정한론의 원인이 되었던 서계사건은 1870년 메이지 정부가 보낸 국서에 사용된 ‘천황’ 등의 용어로 인해 조선정부가 국서접수를 거부한 사건이 발단이었다.

이 때 일본은 체면을 상당히 구겼지만 어쨌건 조선과 수교를 안할 수는 없는 일.

마침 조선 또한 흥선대원군이 최익현의 상소로 물러나고 막 고종의 친정이 시작된 시기였으며 고종은 개항에 적극적이었다.


1875년, 일본정부는 다시 표현을 고친 국서를 서기관 모리야마 시게루에게 주어 동래왜관을 통해 접수토록 한다.

그러나 위정척사파들의 반대는 여전히 극심하였고 여기에 당시 동래부사는 모리야마가 일본의 전통예복 대신 서양예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성내 출입조차 금지시켜버린다.

운요호. 배수량 240톤 정도의 작은 목선이었지만 조선은 이 조차도 막을 힘이 없었다

이렇게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모리야마는 본국에 무력시위를 위한 지원을 요청하게 되고 이에 일본이 파견한 함선이 그 유명한 ‘운요호’이다.     

당시 운요호의 함장 이노우에 소좌(소령)는 이미 보신전쟁 기간동안 막부해군과 여러차례 해전을 경험한 나름의 베테랑이자 과격한 정한파였다.

그는 우선 부산 앞바다로 가서 (앞서 페리 제독이 그랬듯) 부산앞바다 측량을 시작한다.

당연히 당시 관리들은 항의를 하였으나 이노우에는 (역시 페리 제독이 그랬듯) 엉뚱한 소리만 하며 포격연습까지 한다.

운요호의 포격에 부산성내는 발칵 뒤집혔고 양측의 긴장감은 높아졌다.

운요호 사건의 주역 이노우에 요시카 소좌. 이후 그는 해군대장까지 승진한다.

본래 일본의 계획은 이 무력시위를 통해 조선이 굴복하거나 도발에 넘어가면 무력으로 제압 후 개항하려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종은 이미 일본과 분란거리를 만들지도 말고 굴복하지도 말라고 엄명을 내려놓은 상태라 조선정부는 시종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일본으로써도 이 이상의 행동을 취할 명분은 딱히 없었던 터라 부산에서의 1차도발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운요호는 나가사키로 귀항하게 된다.

이노우에는 해군성에 본격적인 조선침략을 건의했으나 일본정부는 굳이 분쟁을 빚고 싶지 않았고 운요호를 청나라의 요동반도로 배치하게 된다.     

강화도 전투를 그린 일본 판화. 옆에서 포를 쏘는 배가 운요호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다시 기절초풍할 일이 일어났으니, 운요호가 요동반도로 가던 길에 굳이 강화도 초지진 앞바다로 온 것이다.

1875년 9월 20일, 이노우에와 승조원들은 배에서 보트로 옮겨탄 뒤 국기도 게양하지 않은 채 초지진으로 접근하였다.

당연히 경계를 서던 조선 초병은 이들이 일본군이라는 것을 알고 기겁하며 경고사격을 하였다.

이노우에와 승조원들은 보트 상에서 우선 소총으로 응사한 뒤 운요호로 돌아가 다음날 함포포격으로 초지진을 박살낸 뒤 영종도에 상륙 후 교전, 조선수군을 궤멸시키고 노략질을 한 뒤 돌아갔으니 이것이 ‘운요호 사건’이다.


그 뒤 귀국한 이노우에는 ‘국제법에 따라 식수를 얻기 위해 접근하던 우리를 조선군이 선제공격하였으며 우리는 대응하였을 뿐이다’는 식으로 사건보고서를 날조하였고 이는 일본정부 내에서 강경파가 득세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현실은 위에서 보았듯 애초에 타국 앞바다에서 무단측량을 진행한 행동이나, 국기도 게양하지 않고 접근한 행동이나, 애초에 국제법을 무시한 것은 운요호 측이었으며 이 보고서의 조작에 모리야마와 이토가 관여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으니 우리와 이토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과연 이것이 과격정한론파 해군소좌의 독단일 뿐이었을까? 진실은 저 너머에...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는 일본과 조선 대표단 (1876)

어쨌거나 발단은 일개 해군소좌의 무단침공이었지만 강경파로 돌아선 일본정부는 본격적인 조선침공 역시 염두에 두고 이듬해인 1876년 2월, 강화도로 운요호를 포함한 7척의 함선을 보내 조선측에 책임을 묻는다.

이에 당황한 조선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청나라 역시도 그깟 조선문제 때문에 일본과 전면전을 벌이고 싶지는 않은 상황으로 알아서 하라며 떠넘겨버린다.

결국 강화도의 연무당에서 12개조의 불평등조약에 서명하니, 이것이 ‘강화도 조약’이다.     


여기서 새삼 다시 강화도 조약의 주요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제1조 –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다. (=청국은 간섭하지 말라)

제2조 – 양국은 사신을 파견한다.

제4/5조 – 왜관은 폐지하고 부산 외에 인천과 원산의 항구를 추가 개항한다.

제7조 – 일본선박은 조선해안을 자유롭게 측량할 수 있다.

제10조 – 일본인의 죄는 일본에서 처벌한다. (=치외법권)

제11조 – 양국간 통상조약을 맺는다.


여기서 보듯 강화도 조약은 일본이 기존 서구열강들과 맺어온 불평등 조약의 강화판이었다. 

특히 11조에 따라 이뤄진 통상조약에서는 선박의 항구이용료만 논의하고 관세는 아예 논의하지 않아 향후 7년간 조일무역은 무관세로 이뤄지게 된다.

서구열강들이 조세를 협의로 정했을지언정 지급은 했던것에 비하면 훨씬 악랄한 조건이었으나 근대외교에 대한 이해가 없던 당시 조선에서는 치외법권도, 관세자주권의 의미도 이해할 수 없었다.

비록 불평등 관세였을지언정 무역관세가 메이지 유신 초기 근대화의 중요한 재원이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한숨만 나오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군을 사열하는 메이지 천황의 판화. 그러나 실권은 주어지지 않았고 군은 천황을 핑계로 내각의 통제를 거부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대만정벌과 운요호 사건, 두 사건 모두 결말이 나쁘지 않게 끝났기에 큰 문제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본질은 군이 정부의 통제를 듣지 않았다는 무시무시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를 문제삼았다 한들 메이지 정부에는 이들을 막을 별다른 제제수단이 없었다.


메이지 정부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징병령이 발효된 것은 1873년에 이르러서였다.

그 전까지 메이지 정부의 군사력은 본래 천황을 호위하기 위해 각 번에서 차출했던 어친병(御親兵)을 상설편제로 전환한 8,000명 외에 각 지역을 지키는 진대병(鎭臺兵)들로 기존 무사출신들이 주축이었다.

문제는 이 무사출신들이 메이지 정부의 재정부담으로 인해 엉망으로 취급받으며 불만이 가득 쌓인 세력들이었다는 것.

그러니 대만정벌 당시 쓰구미치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라 제법 현실성 있는 걱정이었던 셈이다.     


이 문제는 징병제와 군수산업 확충을 통해 정부의 자체 군사력이 충분히 확충되면서 자연스럽게 완화된다.

하지만 정부의 군사력이 충분한 것과 그 군사력이 믿을만한지는 여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미래에 대해 살짝 스포를 하자면, 이토가 내각의 톱을 맡은 동안에는 문관에 의한 군부의 통제라는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지며 일본군의 황금기를 이루어내게 되니, 그 결과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이다.


그러나 이토는 헌법에서 군의 통수권을 내각이 아닌 천황에게 부여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이는 러일전쟁 승리 이후 비대해진 군부와 맞물려 정부가 군부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일본이 군국주의로 빠져들게 되는 계기가 된다.

다음 편에서는 본격적인 이토 이로부미 내각의 전성기로써 메이지 헌법과 국회의 성립과정을 살펴보며 이 영광의 순간에 뿌려진 재앙의 씨앗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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