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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ㄱㅈㅊ Dec 31. 2020

첫 경험, 첫 체스

<퀸스 갬빗> 드라마 평문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비범함과 평범함 두루 갖춘 주인공

첫 경험의 어려움 다뤄 보편성 확보

전형적인 천재 플롯과 달라

굴곡진 삶의 생김새 그려낸 '휴먼' 드라마


드라마 <퀸스 갬빗>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면서도 우리의 이야기다. 일단 주인공 베스 하먼은 ‘체스 천재’다. 그의 빨간 머리는 ‘(천재는)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해도 눈에 띌 수밖에 없다’는 걸 직관적으로 나타낸다. 그는 시설관리인 샤일록과 대국을 몇 판 두더니, 어느새 그는 물론 지역 챔피언, US 챔피언을 대번에 꺾는다. 물론 신경안정제를 복용한 것도 좋은 성과를 얻는 데 도움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복용 사실을 알고 있는 극 중 동료들조차 그의 나이와 빠른 성장세를 보곤 ‘천재’라 인정한다. 베스는 천재답게 목표를 높게 세운다. 그는 체스 끝판왕을 뜻하는 ‘그랜드 마스터’ 타이틀을 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출발점부터 목표치까지 평범한 우리와는 다르다.


해당 드라마는 누구라도 서툴 수밖에 없는 첫 경험을 주요 서사로 다룬다. 우리의 이야기와 맞닿는 지점이다. 주인공인 베스 하먼은 처음 맺는 인관관계에서 결실을 이루기까지 무척 허둥댄다. 부모-자식부터 연인을 비롯해 동료까지, 모든 인간관계가 그에게는 처음이고 낯설다. 또한, 그는 처음으로 흥미와 적성을 찾고 처음으로 ‘우승’이란 목표를 마음에 품는다. 베스는 그 과정에서 성장통을 앓는다. 평범한 우리가 나이를 먹으며 겪었던 지난함을 그도 겪는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듯,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첫 경험도 나온다. 육체적 관계 이후에 베스 하먼은 ‘음, 뭐지?’란 표정을 지으며 사랑에 대해 고민한다. 기분과 정서를 통제하는 경험도 극에 나온다. 신경안정제 약을 통해 자기 자신의 내면과 상태를 처음 제어할 수 있었고, 이후에도 이를 위해 약에 집착하다가 수렁에 빠지기도 한다.


이 점이 기존에 나왔던 천재 영화들과 달랐다. ‘이미테이션 게임’, ‘닥터 스트레인지’, ‘커런트 워’ 등에서 볼 수 있었듯, 세상에서 소외된 천재는 후반부에서 세상과 교감하며 극을 맺었다. <퀸스 갬빗>은 세상(혹은 타인)이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 드라마는 주인공이 주인공 '자기 자신'과 교감하며 극을 마친다. <퀸스 갬빗> 공동제작자 앨런 스콧은 한 인터뷰에서 “한 천재가 세계 정상에 오르는 이야기지만, 진짜 주제는 내면의 갈등”이라 말한 바 있다.

 

가혹한 시련이 스토리 내내 베스를 감돌았다. 주인공 베스 하먼의 경우는 낯섦의 정도가 무척 크고 깊다. 평범하지 않은 체스 능력이 그에게 '+'로 작용했다면, 평범하지 않은 성장 환경은 그에게 '-'로 작용한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친부에게 버림받고, 친모의 사고사로 갑작스레 고아가 되어 보육원에 들어가게 된다. 예배실에 머무는 또래 얘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지하실에 가서 체스에 관심을 둔다. 원장은 이를 나무란다. 베스는 체스 역량을 인정받아 다니게 된 학교에서도 그곳 학교의 학생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때 동료들은 ‘다름’보다 ‘이상함’이 다분한 시선을 그에게 보낸다. 후반에 다다를 때까지 그의 비범함은 '-'인 불우함 쪽으로 기운다.

 

평범한 것을 정상이라 재단하는 시대의 나른함도 '-'에 무게를 더했다. ‘체스를 두고 싶다’는 그의 선택에, 시대는 “낯선 사람이랑은 안 해.” “여자는 체스 두는 거 아니다.”란 시설관리인의 말로 대답을 갈음한다. ‘시대를 보는 눈’이라 일컫는 언론도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 베스가 대회에서 우승해도 기자들은 그가 ‘여자’라는 사실만 조명한다. 심지어 인터뷰에 나선 한 기자는 고아라는 이유로 “창의성과 정신병은 같이 간다”는 어쭙잖은 진단까지 내놓는다.

 

극 중반, 주인공은 체스를 통해 가끔이나마 '-'를 '+'로 엎곤 한다. 그에게 체스는 '굴곡진 만남'이다. 그가 여러 국제대회에서 우승하자 세상은 그에게 환호를 보낸다. 베스는 ‘체스’로 세상과 밝게 교감하기 시작한다. 그는 체스를 두면서 사람 얼굴을 보고 표정과 마음을 읽는다. 베스 앞에 있던 사람은 1) 머리를 빗고 2) 하품을 하고 3) 싱긋 웃었다. 그가 체스를 두며 쌓는 경험은 1) 체스 대전과 2) 타인과의 교감이었다. 어두운 만남도 있다. 양모를 잃고서 그의 내면을 곱씹어보고, 시설관리인이 죽고서야 그가 베스의 행적을 좇고 있었단 걸 알아차리는 등 '상실'의 만남이다. 이는 극 후반부에 다시 '회복'의 만남이 된다. 베스는 세계 최고 그랜드마스터 보르고프를 이기기 직전에 동료, 양모, 그리고 체스를 처음 알려줬던 시설관리인을 다시 떠올린다.

 

베스는 ‘그랜드 마스터’ 타이틀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불우함'이란 단면을 '특별함'이란 면으로 완전히 뒤집은 장면이다. 주인공의 체스 기술과 능력이 뛰어난 것도 성공의 이유겠지만, 주인공이 마침내 체스를 두게 된 시작점부터 체스 최고 타이틀 획득이란 끝맺음까지 오롯이 해석해낸 데 더 큰 이유가 있다. 스스로와 진정으로 소통하고 충분히 교감한 것이다. 약과 술을 완전히 극복했는지 여부는 더이상 중요한 명제가 아니다. 약과 술은 '-'의 본질이 아니었고, 또 극복의 대상이 아니었다. 총괄 프로듀서 윌리엄 호버그가 “베스가 약물과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났는지를 모호하게 두었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한 이유도 이런 맥락 때문이다. 주인공 베스에게 필요한 건 맹목적인 극복이 아니라 입체적인 수용이었다.

 

그는 끝내 편안함에 이르렀다. 소련의 평범한 노인들 사이, 체스판 앞에서 미소를 짓는 베스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며 영화는 끝맺는다. 첫 경험과 첫 체스에서 불안이 비롯되긴 했지만, 결국 안정으로 귀결된다. 폰 하나를 일부러 희생해 포지션에 이점을 가져간다는 ‘퀸스 갬빗’처럼, '-'에서 시작해 0에 머물렀다가 '+'로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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