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게 문제인가
얼마 전 친한 동생과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날 좋아하는 사람과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 동생은 말했다.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라면 시작의 마음이 크지 않아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나는 그랬다. 절대 불가능하다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라 해도 내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를 만날 순 없었다. 아니,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
18년 지기 (남자 사람) 친구가 그랬다. 난 좀 가벼워질 필요가 있다고. 물론 내가 하는 사랑이나 열정이 부럽긴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려면 ‘그냥’ 만나볼 필요도 있는 거라고. 나는 그랬다. 절대 불가능하다고.
남자를 ‘그냥’ 만날 만큼 외로운 것도 아니거니와 내 외로움은 이성(사람)으로 채울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냥의 영역엔 최소한의 욕정도 포함될 텐데, 내겐 해당 분야 또한 사랑의 영역이라 좋아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면 흥미가 없었다. 그러니 굳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에 시간과 돈, 정성을 쏟을 이유는 없었다. 그냥 누군가를 만날 바엔 혼자 있는 게 생산적이었다. 날 채울 수 있는 건 내가 좋아하는 사람 말고는 없었다.
친구는 내 그런 진지함을 부담스러워하는 남자들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않나. 진지함이 부담스럽다면 그 사람은 늘 그래왔듯 덜 진지하게 이성을 만나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다들 자신에게 맞는 사랑의 크기를 선택하고 그에 책임지는 것뿐이니. 나는 사랑이 주는 변화와 힘을 믿는다. 내가 그런 진지한 사랑으로 변한 케이스였기에, 그냥의 사랑을 용납할 수 없는 것뿐. 진지함이 누군가와 맞지 않을 순 있지만 그게 문제라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생각해 보면 예전부터 그랬다. 어릴 때부터 사랑에 진지한 편이었다. 좋아하는 마음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고백은 나를 힘들게 했다. 그냥 거절하면 되지 않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상대의 마음이 느껴지면 덜컥 겁부터 나서 미친 듯이 선을 그었다. 어떤 식으로든 다가오지 못하도록 선을 그었다. 나는 절대 그 사람을 좋아할 수 없을 테니까.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내가 좋아한 사람은 처음부터 그럴 것 같았던 사람이었다. ‘망했다. 좋아할 거 같아’라는 생각이 들고 머지않아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됐다. 마음의 크기가 커질 것 같은 사람은 느낌부터 달랐다.
사랑의 무게가 다르니 친구들이 장난을 친다며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와 엮을 때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다. 감정이 얽힌 부분에 관해서는 내 감정도 상대의 감정도 조심하게 다룰 필요가 있기에, 가볍게 마음을 언급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곁에 두지도 않았다.
좋게 말하면 진지한거고 나쁘게 말하면 쓸데없이 보수적인 건데,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이해의 연장선이 연애라는 관계의 결말이었고. 그러니 연애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하는 일은 기적의 확률이라는 걸 안다.
흔히들 여자는 자신이 더 사랑 받아야 행복하다 말하는데, 그 말은 백번 옳다고 생각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고 상대방의 고백을 유도하거나 날 좋아하게 만드는 건 머리가 아파서 시도할 생각도 못 했다. 그 와중에 상대의 어장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상황도 견디질 못했다. 그놈의 밀당, 썸. 애매하고 불확실한 모든 걸 싫어했다. 명확한 건 내 마음 밖엔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마음. 내가 싫어하는 마음. 나의 의지.
알고 있다. 이 글은 사랑 때문에 자책하고 싶지 않은 자의 발악이다.
진심의 무게가 상대를 부담스럽게 한다면 누구에게도 진심을 보여줄 수 없을 텐데, 사랑받기 위해 내 마음의 무게를 덜어내는 노력을 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렇게 해서 받는 사랑이 내게 도움이 될까. 그렇게까지 사랑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뭘까.
나는 좋아했을 뿐이고 그는 아니었을 뿐인데. 그냥, 그뿐인데. 정말 내가 문제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