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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를일별진 May 19. 2024

비혼주의는 아닙니다만

결혼해도 외로운 건에 대하여



- 1 -


얼마 전, 새벽 5시에 전화 벨이 울렸다. 엄마였다. 놀란 마음에 전화 벨이 몇 번 더 울리기도 전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엄마, 무슨 일 있나! 뭔데!   

- (…) 진아, 엄마가 우리 딸 한테 갈까. 서울 갈까.


큰 일이 난 줄 알았다. 긴 시간, 우울증을 깊게 앓았던 엄마였기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엄마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말은 이러했다. 잠이 안와 TV를 보고 있는데 문득 내 생각이 났단다. 하필이면 매번 하던 통화를 2일 정도 못하고 있던 때였기에, 엄마는 내가 우울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고 했다.


- 우리 딸 혼자 서울서 외로울까봐.


내가 하루 이틀 혼자 있던 것도 아닌데. 아, 그건 아닌가. 생각해보니 온전히 혼자 지낸 건 작년 10월부터였다. 내게는 늘 반려묘 대근이가 있었고 대근이가 떠난 뒤 도망치듯 향한 부산에선 가족이 있었다. 다시 서울로 와서도 한동안 조카와 함께 지냈으니 따지고 보면 혼자인 적은 없었다. 그래도 최근 외롭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기에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 뒤, 내가 부산으로 내려가겠다고 했다. 엄마는 내심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엄마가 좋으면 나도 좋았다. 그래서 지난 주 내내 부산에 머물며 엄마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 2 -


외로웠던 건 엄마였다. 남의 외로움을 잘 보게 된다는 건 자신이 그 감정을 알기 때문이다. 나의 감정이 남에게 투영된다. 누군가에게 보고싶다, 네가 걱정된다 말하는 건 그 말을 하는 나를 돌아봐 달라는 뜻이다.


엄마를 가장 외롭게 만드는 건 아빠였다. 엄마의 남편은 다정하고 우직한 사람이었으나 뼛속 깊은 자격지심이 있었다. 일종의 트라우마다. 한평생 부정적인 말만 일삼던 아빠의 부모님. 그들의 막말은 아빠의 마음 속에 ‘무시당하는 일’에 대한 트라우마를 만들었다. 아빠는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자신이 조금이라도 무시당했다는 기분이 들면, 동물이 자신의 몸집을 키우기 위해 털을 부풀리듯 날선 말을 쏟아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다. 아빠는 부모님을 미워했으나 그만큼 사랑받고 싶었기에, 가족이 봐도 대단하다 싶을 만큼 막말을 듣고 막말을 하면서 부모님을 챙겼다. 내 입장에서 ‘친가’는 트라우마의 집합체로 보였다. (어쩌면 그 또한 내게 트라우마라, 나는 막말을 하는 남자를 극도로 싫어한다)

아빠의 막말은 비단 부모님만을 향한 게 아니었기에 엄마와 나는 매번 상처를 받았다. 심한 건 엄마였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아빤 서로를 존중하는 ‘생산적’ 대화를 배운 적이 없었다. 배울 수 없었다고 보는 게 맞다. 그건 아빠의 결핍이다. 그러니 대화가 통할 리 없었다.


엄마는 외로웠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고 인생의 고민을 나누지 못했다. 아빠가 엄마의 든든한 버팀목인 건 맞지만 채워지지 않는 건 절대 채워지지 않았다. 엄마의 남편은 성실한 가장이었지만 여자로서 의지할 수 있는 남자는 아니었다. 그러니 엄마가 해야하는 건 기대를 버리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라는 게 도대체 뭔지, 지금껏 엄마와 아빠는 같은 문제 때문에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하고 있다.



  - 3 -


나는 아빠와 사이가 좋은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아빠의 딸이기에 그와 비슷한 면이 많았다. 다른 게 있다면 내 부모님은 엄마아빠였다는 것. 다른 성장환경을 감안했을 때 아빠 행동 이면의 원인은 분명했다. 이해하지 못할 건 없었다. 다만 이해의 범주와 관계없이 싫은 건 여전히 싫으니 문제였다. 나는 아빠를 닮지 않기 위해 부던히 애를 썼다. 아빠처럼 욱하지 않으려 하고 아빠처럼 밥 먹지 않으려 하며, 그러한 면모 때문에 아빠를 미워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아빠는 좋은 사람이다. 나를 위해 많은 걸 희생했고 언제든 서울이 힘들면 내려오라 말하는 사람이다. 네잎 클로버를 모아 내게 건네는 사람이다. 내가 싫어하는 아빠의 모습은 아빠의 탓이 아니다. 그걸 알고 있다. 엄마도 그걸 안다. 아빠의 환경을 옆에서 지켜봤으니까. 하지만 아는 것과 바로 옆에서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다. 딸로선 엄마가 편해지기 위해 아빠의 문제를 그 자체로 이해하고 요령껏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여자로선 엄마가 황혼 이혼을 한다 해도 말릴 수 없다. 엄마의 외로움은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남편 때문에 오는 거니까. (아빠의 외로움은 오랜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한 누구도 도울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가족이기에 ‘아빠를 무시하지 않는다’고 계속해서 말해줄 뿐이다) 엄마와 아빠는 기본적으로 사이가 좋은 편이지만, 관계에 깊이가 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순 없다. 딸로서 지켜본 바는 그렇다.



- 4 -


결혼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다. 특별하지 않은 이상 대부분의 결혼 후 생활 양상은 비슷할 거다. 보고 들은 걸 감안했을 때, 중요하게 생각되는 건 역시 ‘말’이다. 나 또한 친가의 영향을 받은 게 맞다. 막말을 하며 행동이 다정한 아빠를 보면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나는 츤데레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말과 행동을 일치 시킬 수 없다면 둘 중 하나는 아예 안 하는 게 낫다. 그리고 함께 있는데 외로울 거면 연애든 결혼이든 안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나는 괜찮은 척 행복한 척하며 살아갈 자신은 없다.

흔히들 결혼은 아무것도 모를 때 빨리 하는 게 낫다고 하는데, 요즘들어 생각해보면 아는 게 많아서 기대없이 하는 결혼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관계를 망치는 건 대부분이 '기대'로 인해 비롯된 문제다. 기대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혼자 기대라는 걸 하기 전,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솔직히 대화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아는 것 뿐이니까.



- 5 - 


확실해진 건 있다. 연애든 결혼이든 상대를 볼 때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세가지에 대한 거다.


‘거리유지’가 되는가.

서로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자기 검열’이 가능한 사람인가.


다만 모든 걸 정확히 보려면 내가 ‘결핍’이 최소화된 상태여야만 한다. 그래야 상대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외로움이 그렇듯 자신의 결핍은 대체로 상대에게 투영되므로, 내 문제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으려면 나부터 정신을 차려야 한다. 아, 간단한 이치에 도달했다. 일단 내 문제 내 환경부터 정리하자. 좋아하는 마음이 중요한 게 아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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