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 하던 날 아침.
전경으로 2년 동안 먹고 자던 인천의 한 경찰서에서 나와서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서 광화문으로가는 광역버스를 타고 서울로 갔다. 집보다 먼저 간 곳은 방배동의 한 영화사. 마침 복학까지는 두 달 정도 여유가 있어서 영화 제작부로 일해보겠냐는 학교 선배의 소개로 영화사에 갔다.
“언제부터 출근 할 수 있니?”
“제가… 집이 지방인데요. 오늘 제대를 해서... 한 이틀만 놀다 와도 될까요.”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던 친누나 집에서 지내면서 그렇게 두 달을 제작부로 일했다. 학교에서 찍는 학생 작품이 아니라 상업영화 였다. 그때 내가 몰던 제작부 소품 트럭은 같은 시기에 촬영중이다가 잠시 촬영이 중단된 황해 팀에서 빌려온 트럭이었다. 생각해보면 참 선배들 덕을 많이 봤다. 땡큐 서울예대.
이제 막 제대 했으니 뭐든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안 그랬다. 월급 80만원에 잠만 집에서 잘 수 있는 근무 여건. 누가 그땐 다 그랬다고 하면 지금 너보고 그때로 가라면 갈거냐고 묻고 싶다. 안 갈거잖아. 그래도 처음 해보는 영화 일이 다 신기했다. 촬영장에선 배우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촬영장 밖에 나가서 주차정리를 해도 재밌었다. 7월이었다. 검은 옷 입고 나간 날은 염에 쩌들어서 옷이 하얘져도 그래도 재밌었다. 근데 괴로웠다. 저 사람은 왜 후배들을 때리지? 왜 못 할걸 다 알면서 못할 일을 하라고 하지? 이쪽 바닥에 흔히 있다는 흔한 사람을 만났고, 다 이런 사람들이 일하는 바닥이라면 안 하고 싶었다. 촬영이 끝나고 소품을 정리하다가 그 제작부장에게 ‘이제 좀 제작부처럼 일하네.’ 라는 소릴 들었을 때 아, 나도 할만 큼 했다, 이제 관둬도 되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회차 촬영을 남겨두고 관두겠다고 하자 영화사에서는 계약금으로 받은 80만원을 토해내고 가라고 했다. 세후 칠십 몇 만원이었다. 그때는 뭣도 몰라서 그 돈을 다시 주고 나왔다. 그게 내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하는 방송 일이 그랬던 모양이다 종종 매체에 글을 쓰는 작가 중에 방송작가였던 시절을 괴로워 하며 글을 쓰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의 글이 싫었다. 방송 작가 출신이라며 방송 작가 시절을 돌아보는 독립출판물도 있었다. 기가 찼다. 고작 몇 달 혹은 프로그램 몇 개 해본게 다 면서 방송작가들은 다 이상한 사람들 처럼 묘사하는 늬앙스가 불쾌했어서. 돌아보니 나한테 영화 일이 그랬다. 내가 본 건 그게 다니까. 어렵게 생각 할 게 있나. 그냥 나한테 개새끼면 다 개새낀거야. 어쩌겠어.
영화사로 출근한다며 으스대며 제대 하던 날, 누구는 그랬을까. 저새끼 제대해서 이제 좀 살겠다고. 모르지, 나도 어딘가에선 개새끼였을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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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잠이 안 와서... 소주 한잔 놓고 영화 보면서 앉아 있다가 별 생각이 다 드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