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슨 사회화 덜 된 소리냐 할지 모르겠지만 4대 보험의 ‘4대’가 정확하게 어떤 항목인지 검색하지 말고 말해보라면 모른다. 돈 버는 사회생활이 벌써 십 년째인데 이 지경인 이유는 지금껏 4대 보험이 되지 않는 프리랜서 생활만 해왔기 때문이다. 술만 마시면 우리 아들 방송국 다닌다고 동네 아저씨들에게 유세 떨던 아빠에겐 미안하지만 방송국에 다닐 뿐이지 방송국 소속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해서 말하자면 방송국에 ‘직원’으로 소속된 구성 작가는 없다. 샛강역에 있는 KBS가 TBC였던 시절에는 ‘공채 작가’라는 게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의 인터뷰에서는 공채 작가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현재 공채 작가라는 건 없다. 난 소속감 대신 ‘프리’랜서라는 자유로움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게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방송국 구성 작가도 회사원과 크게 다를 게 없다. 근무 시간이 ‘9 to 6’가 아닐 뿐이지 각 프로그램마다 출근 시간이란 게 존재하고, 공식적이지 않을 뿐이지 연차나 반차를 쓸 때도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하며, 퇴근 역시 늘 자율적이지는 않다. 급여도 개인마다 다르긴 하지만 연차에 따라 어느 정도 정해진 선이 있다. 일반 회사원과 크게 다른 점은 4대 보험이 되지 않는다는 것뿐. 매달 내야 하는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은 그 큰 뜻은 알겠으나 이상하게 나라에 달마다 돈 뜯기는 느낌이고, 고용 보험에 가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 프로그램이 끝나고 다른 프로그램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쉬는 동안 ‘실업 급여’ 같은 걸 받을 수도 없다. 산재? 다치고 아프면 내 손해지. 그러니 작가들이여 안구건조증과 손목 터널 증후군을 우습게 넘기지 말라…. 일해온 환경이 이렇다 보니 우스갯소리로 누가 이상형을 물으면 이렇게 답하곤 했다. “4대 보험 되는 사람이요. 그래도 한 명은 좀 더 멀쩡한 사회 구성원인게 좋잖아요.”
웃자고 하는 소리였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잠깐 업혀가고 싶다는 마음도 없지는 않다. 결혼을 했다 가정하면 신혼부부의 매달 고정 지출 비용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만만치가 않을 터. 그 짐을 잠시 배우자 혼자 지게 되더라도 유지할 수 있는 생활. 너무 이상적이지 않은가? 꼭 나 같은 프리랜서가 아니더라도 회사를 다니다가 관두게 되는 경우는 부지기수다. 인생에 힘든 시기가 어디 한두 번이겠나. 이럴 때마다 누군가에게 잠시 ‘업혀’ 지낼 수조차 없다면 이 험난한 세상을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부모님이 물려주신 부동산 하나 없이는 정말 자신이 없다. (아빠, 그 아파트 진작 팔으라니까 쫌…. 지방의 오래된 아파트는 서울에서처럼 ‘떡상’할 여지가 없다.)
라디오 작가는 누구 하나 관 짜서 나와야 자리가 생긴다는 헛소문이 도시 전설처럼 퍼져 있는 방송가에 얼마 전, 누구 하나 죽지 않고 라디오 작가 자리가 났다. 내가 관뒀으니까. 진행하기로 한 공연 건을 믿고 라디오 구성 작가에서 콘서트 구성 작가로 나름 이직을 준비했는데 그 결심을 할 때만 해도 코로나 19 사태가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은 몰랐다. 준비하던 공연은 모두 취소 됐다. 인생은 알 수가 없고, 그래서 보험이란 게 생겨난 거구나. 자동차, 운전자 보험 말고도 인생에 몇 가지 보험이 더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나는 프리랜서 작가 생활을 관두고 오디오 콘텐츠 제작사에서 PD로 일을 하게 됐다. 고민 끝에 프리랜서 생활을 청산한 것이다. 4대 보험 되는 배우자가 없다면 나라도 4대 보험이라는 울타리 안에는 들어가 있어야지 싶기도 했고. 10년을 프리랜서 구성 작가로 버텼다는 건 꽤나 자부심을 느끼는 일이었지만 더 이상은 고집이란 생각도 들었다. 예능 쪽에는 남자 작가들이 많아졌다곤 하지만 2021년 지금도 여전히 구성 작가 비율은 여자가 월등히 높다. 최근까지 일하던 KBS FM라디오 채널에서 남자 구성 작가는 꽤 오랫동안 나 혼자였고, 내가 관두고 나니 이제 아무도 없다. 남자 작가의 원고에 감성이나 디테일이 부족해서냐고? 아니, 다들 나처럼 4대 보험을 찾아 떠났을 뿐이다. 1년에 두어 번 찾아오는 개편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아 머리에 동전 하나만큼의 원형탈모증이 두 번이나 찾아왔다. 나는 일자리보다는 머리카락을 지키기로 했다.
아, 어쩌면 결혼이란 제도 자체가 보험인지도 모르겠다. 호옥시나 둘 중 하나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도움이 되어주기로 서로 간에 드는 보험. 가입 전에 꼼꼼하게 따져봐야 하고, 만기 전에 깨면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괜히 들어놨나 싶다가도 큰일을 치르게 되었을 때 없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는. 다들 들어놓는 데는 이유가 있는 보험. 얼마 전 받았던 건강보험 상품 권유 전화가 자꾸 귀에 맴돈다. “고객님, 늦을수록 손해세요….”
(** 근로자는 의무라는데.....음...)
** 에세이 <저 결혼을 어떻게 말리지?>의 일부 에피소드를 브런치에 연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