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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Mar 14. 2019

너랑 멀어지고 싶은 건 아니지만

너의 결혼식은 가고 싶지 않아

네 결혼식, 안 갈 거야.


사회인 경력이 쌓여도 선뜻 나오지 않는 선언. 너의 결혼식에 가지 않을 예정이니 청첩장이 필요 없다는 것. 관계 절단과 약간의 저주까지도 각오하는 말. 하지만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고등학교 동창이거나, 가까운 직장 동료지만 서로의 결혼식에 참석할 만큼 친하지는 않다. 네가 짝을 찾아 결혼을 결심한 것은 축하받을 일이나, 애석하게도 나와는 큰 관련이 없다. 네 맘에 드는 요란한 웨딩홀이나 고급스러운 꽃장식을 위해 나의 수입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애초에 내 인생엔 나의 결혼식 계획이 없거니와, 만약 한다 해도 너는 내 초대 리스트에 들어있지 않을 것이다. 무슨 연을 끊자는 말이 아니다. 우리 사이가 그냥 이 정도인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아마 앞으로도.


쿨한 마음이 쿨한 표정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어쩐지 오랜만에 보자더니,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더라니. 어느 틈에 결혼 사실을 알리는 절친보단 먼, 지인보단 가까운 어색한 친구들.

“미안한데, 나 그날 못 가. 그래서 청첩장 안 줘도 돼.”

얘기를 하는 동안 실핏줄 몇 개는 터져 나간 듯 내 얼굴에 벌겋게 열이 오른다. 예상치 못한 반려 통보를 받은 그들도 눈에 띄게 당황한다.

“왜? 와~~ 와서 밥만 먹고 가도 돼~~”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더러 그래도 봤지만 곤란한 설득만 계속될 뿐이다. 이럴 땐 단호한 게 좋다. 

세상엔 당신의 결혼식이 당신만큼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전혀 쿨하진 못하지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용기를 쥐어짠다.

“난 앞으로 결혼식에 안 가기로 했어.”

대개 이 정도 되면 그쪽도 기분이 나빠져서 그만 멈추고 만다. 대화는 급하게 웨딩홀 바깥의 세상으로 빠져나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찜찜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거나, 카페에서 나온다.


좋은 날, 행복하라고 성의 표현 좀 하는 게 왜 이리 싫을까. 하지만 그 초대는 나를 5만 원이나 10만 원 봉투 사이의 무언가로 만든다. 음식이 맛이 있네 없네, 신부가 살이 쪘네 말랐네, 신랑 친구들이 많네 적네, 오지랖 심한 수다들에 내 시간을 쓰기 싫다. 온갖 양식이 다 섞인 결혼식장의 미감도, 내가 초대받은 결혼식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손님들로 붐비는 홀도 싫다. 여기서 진심 어린 축하 운운했다간 어린애 취급이나 받는다.


어린 시절, 아빠가 흰 봉투를 찾는 주말 오전이 있었다. 아직 머리털이 검은 그가 이 옷을 입었다가 저 옷을 입었다가 봉투 겉면에 글자를 몇 번이나 고쳐 쓰던 날들이 있었다. 마침내 마음에 드는 '축 결혼'을 한자로 적어내고, "어때 잘 썼어?” 할 때의 자랑스러운 얼굴이 좋았다. 그럴 때 어디 가냐고 물으면 아빠는 누구네 결혼식이 아니라 "잔치에 간다"고 했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잘 쓴 글씨를 갖고 가야 하는 날. 제 나름의 진심만 있으면 마을 사람 모두 떠들썩하게 기쁜 날, 나도 어른이 되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축하를 담아 소중한 친구들의 잔치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니 받게 되는 청첩장이 생각보다 많았다. 나에게 청첩장을 줄지 몰랐던 사람들도 청첩장을 주었다. 그렇게 가는 결혼식은 잔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몰랐지만 회사에 다니는 나는 이제 안다. 결혼식이 축하보다는 금전 관계와 인맥이 복잡하게 얽힌 문제라는 걸. 그리고 결혼식을 안 할 나에겐 친분도 애매한 사람들의 온갖 축의금은 소득 공제도 안 되는 기부금일 뿐이라는 사실을. 남자 친구와 함께 살아도 결혼은 안 할 거라는 얘기를 들으면, 훈계부터 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축하를 할 수 있을까? 자기들의 만족을 위해 하는 일에 왜 내가 돈을 보태줘야 할까? 그렇게 결혼식이 힘들고 돈이 궁하면 하지 않아도 된다. 그 옵션이 당신에겐 있었다.


한국의 청년들은 알 것이다. 한국에서 프로 불참러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를. 하지만 결심했다. 더 이상 의미 없는 결혼식들엔 가지 않기로.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생각대로 살 순 없잖아.


너의 잔치가 나의 잔치처럼 느껴지는 결혼식들만 갈 것이다. 그렇게 살기에도 주말은 짧고, 내 월급은 부족하다. 본전 생각이 나지 않는, 얼마를 낼지 고민 안 해도 될 결혼식에만 가고 싶다. 소중한 사람들의 좋은 일에 아낌없이 축하하고 싶다. 그들의 셈에 내 축의금이 포함되면 기쁠 것이다. 나의 월급 일부가 너의 신혼 생활 속 작은 추억이 되면 아깝지 않을 것이다. 휴양지에서의 허니문, 발음도 어려운 메뉴를 시켰다가 한입밖에 못 먹고 버린 이야기를 들으면 함께 깔깔깔 웃을 수 있을 것이다.


봄이다. 온갖 사람들이 결혼을 할 것이다. 또 땀을 뻘뻘 흘리며 말해야지. 더 소중한 잔치를 위해.


그 청첩장, 안 받아도 서운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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