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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Dec 11. 2018

서귀포을 아시나요

겨울 제주, 엄마

9월이었나, 아침에 깨보니 엄마에게서 문자가 와있었다.


06:47

영희야~ 주소을 물어본건 제주에서 편지써서 부치고 떠날려고 했는데 김샜어


첫 줄을 읽자 마자 잠이 덜컥 깼다. 그래서 물어봤구나. 그저께 쯤 엄마가 하도 집요하게 주소를 물어보길래 자취방에 찾아올까봐 짜증만 냈던 터였다. 이어지는 문자를 읽은 뒤엔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감히 울 수도 없고, 뭐라 답하기도 어려워서.


언제나 제주는 설레는 맘으로 왔다 아쉬움 많이 남기고 떠나는 곳이야

하지만 마음속에 따뜻함과 서글픔과 많은 사연들이 고여있는 곳이야


혼자 오는 제주는 옛날에 등록금 못내서 전학서류을 못하고 바다을 보는데

까만 바위에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걸 보면서

쓸쓸했지만 굳게 굳게 다짐했고 꼬옥 성공하자~~

근데 지금 성공이 눈앞에 보이고 있어 그 세월이 40년이네~~


혼자 마음껏 생각하고 마음껏 바라보고~

어제 유람선도 혼자 타고 노래 서귀포을 아시나요 불렀다~


혼자 떠난 여행. (그렇게 두는, 참 정도 멋도 없는 딸.) 성산 앞바다 유람선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는 중년의 여자. 단체 관광객들이 벅적이는 가운데, 엄마 혼자 “서귀포를 아시나요”를 부르는 모습. 이 장면의 정서는 분명 슬픔일 것이다. 그런데, 노래를 찾아 들어보니 리듬이 너무 명랑한 것이다. 당황스러움과 슬픔이 팽팽히 싸우던 차에 나는 결국 우는 쪽을 택했다. 이어지는 가사 때문에.


“밀~감향기~ 풍겨오는 가고 싶은 내~ 고향”


엄마에게 제주는, 아직도 밀감 향기 가득한 가고 싶은 고향이었구나.




엄마는 서귀포에서 자랐다. 열네살에 거기서 도망쳤다. 육지에서 이날 이때껏, 엄마는 저 혼자 자기를 길러냈다.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리고, 사업도 시작했다. 그러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도 제주도에 가지 않았다. 너희 엄마 진짜 독하다며 아빠만 다녀왔다. 나는 엄마도 독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껏 나쁜 아비에게서 도망쳐 나와 만난 게 나쁜 남편이니, 그러고도 덜컥 나를 낳아버렸으니, 딸 둘을 더 낳고, 여직 기르고 있으니, 엄마도 참 물렀다고.


외할아버지.

40년 전, 외할머니를 홧병으로 죽게 한 사람.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나쁜 남편, 나쁜 아빠였던 사람. 14살 여자애가 십원 하나 없이 칠백리 바다를 건너게 한 사람. 그러고도 제 자식들에게 단 한번의 사과도 없었던 사람. 그런 사람이 살던, 제주. 그런데도, 엄마는 평생 제주가 그리웠구나. 중학교도 못간 그 어린 게 얼마나 얼마나, 그리웠으면. 집 앞의 귤나무가, 친구들이, 학교가, 그 바다가 얼마나 사무쳤으면.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꽃보다 할배에서 배우 김용건 씨를 펑펑 울게 만든 질문. 방송 내내 유쾌한 캐릭터였던 그가 울어서 화제가 되었던 장면. 김용건 씨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다시 태어나고 싶어.”


나는 어쭙잖게도 그 마음이 이해될 것만 같았다. 엄마에게도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분명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했을 테니까.


“젖도 제대로 먹든지, 분유를 먹든지 뭐 이유식을 하든지

그런 혜택을 못 받았잖아요… 뭐 나뿐만이 아니라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젖을 먹는 것이 “혜택”이었던 세대.

이유식 하나, 가방 하나, 신부 입장할 때 손 잡아주는 것 하나, 그 어느 하나 받지 못한 엄마. 부모로부터 평범한 혜택 하나 받아 본 적이 없어, 사랑을 주는 것도 영 서투른 엄마. 읍니다가 습니다로 바뀐 게 언젠데, 아직도 를자를 다 틀리는 우리 엄마. 그러고도 꿋꿋하게 유람선에서 혼자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사람. 어떻게 저런 일을 다하나 싶은 대단한 사람. 그 모든 걸 다 겪고도 계속해서 살아가는 사람. 지금 이 생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사람.


나는 엄마가 여지껏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오직 이것만으로도 자식에게 가르쳐줄 모든 것을 가르쳤다고 생각한다.





지난 주엔 제주도에 다녀왔다. 이번에도 엄마랑 같이 간 건 아니었으니, 참 멋도 없고 정도 없는 딸. 엄마가 바다를 건너 온 게 어느 계절인지 모르겠지만, 까만 바위에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걸 보면서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다시 태어난다면 엄마의 친한 친구가 되고 싶다고. 그냥 무조건 응원할 수 있는 그런 친구로. 엄마 같은 딸, 나는 못 키울 테니까. 이렇게 크고 넓은 사람은 나 같이 작은 사람이 못 키울 테니까. 앞에서 맘껏 울어도 되는 친구가 되어 꿋꿋이 걸어나가는 그녀의 등을 이정표 삼아, 너 참 잘하고 있다 말해줄 수 있는 동갑내기가 좋겠다고, 겨울 제주에 빌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jCgI0xAOMQ


1973년 노래라니, 정말 엄마가 13살 때.

배에 몰래 숨어 바다를 건너며 몇번이고 들었겠구나, 서울살이 고될 때 마음 속으로만 몇번이고 불렀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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