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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Dec 08. 2018

멘탈의 취소 수수료


휴가를 반려 당했다. 나말고 남친이. 후쿠오카행. 료칸과 가이세키 요리, 미슐랭 1스타의 오마카세, 텐진역 근처에 즐비한 현지인 술집들이 함께 반려 당했다. 그 스케줄엔 물론 나도 포함이다. 남친에게서 휴가 반려 전화가 오던 그 시각, 나는 2박 3일의 일정 중 3일차 오전까지를 완성하던 차였고, 료칸에는 예약 의뢰를 넣어 놓은 상태였으며, 아고다에는 이미 예약된 호텔이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한민국의 어느 소방대장은 저연차 대원이 작년 5월에 떠난 후쿠오카 여행을 기억했고, 뭔 놈의 해외를 1년에 두번이나 가느냐며 투덜거렸다. 아끼는 후배의 휴가를 지켜주고 싶었던 팀장의 교육 일정 조정 요청은 그렇게 묵살당했다. 

멘탈에도 취소 수수료가 필요하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계획이 사라질 땐 부풀어 오른 내 마음도 얼마간 보상을 받아야 한다. 하다 못해 호텔 방 하나, 비행기 좌석 하나도 예약이 취소되면 수수료를 받는데, 나의 기대감은 누가 보상해줄 것인가. 그 휴가 동안 나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나는 그 행복을 진행된 일정 만큼 구체적으로 상상했다. 그리고 스케줄 표와 함께 순식간에 빼앗겼다. 손에 내내 들고 있던 풍선을 지나가던 아저씨가 뻥 터뜨린 느낌. 100% 환불은 바라지 않아도 15%라도 보상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다고 달래질진 모르겠지만.

멘탈의 취소 수수료는 상심한 내가 직접 지불해야 한다는 게 문제다. 소방대장이 알기나 알까. 당신 때문에 밥도 안 먹고 료칸 찾던 한 30대 여성이 지금 굉장히 불행해졌다는 것을. 치킨은 그가 사줘야 하는데, 그가 내 이름조차 모르는 탓으로 닭은 내가 시켜 먹어야 한다. 

닭일까, 닭발일까. 뭘 먹으면 헛헛한 마음이 채워질까. 문득 슬퍼졌다. 해외에 있는 친구들도 많은데. 유럽을 며칠씩 가는 친구들도 많은데. 당장 사무실만 둘러봐도 남미며 어디며 가는 사람들 많은데. 그렇게 큰 욕심 낸 것도 아닌데. 왜 난 할 수 있는 게 없지. 

무기력은 수동성의 다른 말이다. 수동적인 태도는 일상이 반복될 때 시작된다. 똑같은 일상에선 적극적일 필요가 없다. 매일 아침 8시에 버스를 타서 9시 40분 언저리에 회사를 도착하는 일에는 도무지 내가 나서서 해결할 게 없다. 눈 떠지면 버스에 몸을 싣고, 때 되면 밥 먹고, 오티 받으면 대충 아이디어 내고, 팀장님이 시키는 일을 하고. 등 떠밀리는 일상들. 근데 나는 등 떠밀리는 줄도 모르지. 무언가 컨펌을 하고, 돈을 받고, 대리님, 대리님, 누가 나를 찾으니까.

그래서 직장인에겐 가끔 여행이 필요하다. 여행은 무기력의 반대말. 여행은 내가 나서서 모든 걸 결정하고 책임지는 몇 안되는 이벤트. 기력조차 남지 않으면 여행을 못간다. 마지막 남은 기력을 쥐어짜낸 사람만이 비행기를 타는 거다. 골라둔 식당, 먹고 싶었던 바로 그 음식을 먹으며, 인생의 중심에 아직 내가 있음을 가까스로 확인하는 거라고, 직장인의 여행은 그런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최근의 무기력 굴레를 깰 기회를 반려 당한 거다. 나랑 옷깃조차 스치지 않은 사람이 한 말 때문에. 앞으로도 흔한 여행, 흔한 도전 하나 못하겠지. 이렇게 별로 되기 싫은 모습으로 늙어가겠지. 한층 심한 자기 연민에 빠지려던 찰나, 생각을 고쳤다. 이 앞 문장엔 중대한 전제가 생략돼있으니까. “남들 때문에”

자기 연민은 무기력을 즐기는 거다. 나를 극한까지 수동적인 존재로 몰아가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탐닉하는 거다. 그게 왜 그렇게 달콤한지 모르겠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못났고, 그러므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없고, 사람들은 마지못해 나를 만난다. 어쩜 이건 이토록 중독적일까. 나를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어 아무도 몰라 아무도 하는 건. 그건 사실 이 마음에 “남들 때문에”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내가 초래한 게 아니다. 나는 무기력하고, 수동적이니까. 이건 모두 남들 때문이다. 누구는 부모를 잘 만났고, 누구는 에너지가 있고, 누구는 갑부 애인을 만났는데, 내겐 그런 '남'이 없어서다. 교묘한 방식이다. 나는 내 욕을 하는 척 하면서 사실은 나머지 전부를 탓하는 거다. 그러니 달콤하다. 그렇게 혼자 썩는다.

늦은 퇴근 버스에 오를 때쯤, 원인을 바꿨다. 이 우울의 원인은 나. 그러므로 고칠 수 있는 것도 나. 여행은 가고 싶으면 혼자서 가자. 나에겐 갈 힘이 있으니까. 우울할 필요 없는 일이야. 

어차피 취소 수수료는 내가 무는 거다. 인생의 주어는 결국 나다. 그 뒤로 수동태가 와서 붙을지, 능동태가 와서 붙을 지는 내가 정한다. 어떤 이유였든, 누구의 방해였든. 가고 싶은 팀에서 기회가 왔을 때 아니 아니 남겠어 했던 것도. 어떤 돈으로든 사람들이 떠날 때 못가 못가 했던 것도. 남는 시간에 뭘 그리고 뭘 쓰고 놀지 선택한 것도. 결국 나. 그 결말도 내가 받는 것.

주어를 바꾸니까 동사가 바뀐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게 된다. 그중 하나 정돈 제대로 된 처방이 될거다. 이걸 쭉 늘어놓고 나니 조금 개운해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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